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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pr 21. 2024

처음은 어렵지만


J가 놀러 왔다.


멀어서 누굴 부르기도 애매한 도시에 살고 있는 나에게 늘 선뜻 와준다고 하는 친구다. 나조차도 내가 서울로 나가서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유일하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J다. 우리는 지인의 청첩장 모임에서 지인 1과 축가를 불러주는 사람으로 만났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서 우리 둘만 여자였고, 얼큰하게 취한 남자 사람들을 택시에 넣어 보내는 대대적인 작업을 함께 했다. 큰일을 해결하고야 말았다는 만족감에 취해 마주 앉아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청첩장모임에서 만난 모든 인연을 뒤로하고 그렇게 우리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J는 내가 수련하는 요가원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따라 일찍 마쳐서 아래에 내려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련을 마친 탓인지 날씨 탓인지 친구 탓인지 몰라도 방학 첫째 날 같은 기분이었다. J를 태우고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우동집에 가서 함께 냉우동과 냉소바를 먹었다. 재미난 곳에 가기보다 대화가 고팠던 우리는, 우동집 옆 마트에 가서 화이트와인인 줄 알았던 레드와인 한 병과 주전부리를 사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빼곡한 아파트와 산이 보이는 거실에 앉아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테이블 위로 쏟아부었다.


우리의 볼이 빨개지는 만큼 이야기는 무르익었고 자세도 흐트러졌다. 와인병 안의 진한 선이 바닥까지 내려가자 아보씨의 위스키를 가지고 나왔다. 동그란 얼음을 얼려두길 잘했다며 내 멋대로 하이볼을 만들었다. 지금 떠오른 건데 레몬즙도 좀 넣을걸. 맛있는 하이볼을 만들기 위해선 맛있는 위스키가 첫 번째라며 부드러운 위스키향에 취해 하이볼을 홀짝였다.


J는 나에게 늘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는 친구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감 없이 말을 하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언니 생각나서 샀어요. “ 만날 때마다 뭔가를 주섬주섬 내민다. 내 마음도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데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 친구의 애정표현에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이 마음을 다 표현하면 어디론가 흩뿌려져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으로. 사실 경상도 여자라 그런가 표현에 인색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술도 한잔했겠다, 나도 친구를 생각하는 수줍은 마음을 오늘은 꺼내 보이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옛날에 묵혀둔 사건이 떠올라 이야기를 꺼냈다. 잔뜩 숙성시켜 둔 이야기지만 나에게 여전히 신선한 경험이었기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J에게 하고 싶었던 고백이었다.


아주 예전에 J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다. J의 외국인 친구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당시에 J의 외국인 친구가 나로 인해 (따지자면 나의 친구로 인해) 마음 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상한 마음을 나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내게 속상하게 다가온 것이다. 아마 J도 외국인 친구를 생각하느라 나의 마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사과를 하고 넘어갔는데 그날 이후로 한동안 그 일을 떠올리며 밤잠을 설쳤다. 그 사건은 나와 내 친구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닌 문화 차이로 벌어진 해프닝이었는데, 친구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이 내 입장에서 어지간히도 불편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나 오래 안고 있었던 걸 보면.


어서 J에게 이야기를 해서 마음에 쌓인 응어리를 풀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아물었다 싶어 꺼내면 처음처럼 날 것 그대로의 생채기였다. 나는 친구랑 잘 싸워본 기억이 없다. 아니 싸워본 기억도 없다. 서운함을 표현하지 못하다가 통보를 하거나 서서히 멀어진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친한 사이일수록 그랬다. 친해야 감정도 부딪히는 법이니까. 몇 날 며칠을 친구에게 연락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몇 달간 J의 연락도 피하며 마음이 아물기만 기다렸던 것 같다. 어서 아문 마음으로 만나 맥주 한 잔에 털어내고 싶었다.


그 마음이 어느덧 숙성이 되어 꺼내 보일 때가 진작 되었다. 막상 아물고 나니 예쁘게 딱지가 앉았다가 떨어지고 흔적만 희미해진 모양이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만나면 밀린 이야기 나누느라 바빠서 그렇게 잊고 지냈다. 많이 흘러버린 그 이야기를 굳이 굳이 꺼냈다. 내가 꺼낸 이야기를 J는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가 서랍 안 쪽 깊숙이 손을 넣어 꺼내온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서운했던 내 마음이 아니어서 그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J는 미안해했다. 자기가 그렇게 전달했었냐고, 너무 미안하다고. 마음을 억지로 누른 것이 아니라 숙성시킨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에게 말해서 응어리를 풀고 싶었는데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너에게 말하다가 혹여나 서툰 나의 화법에 우리 관계가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 계속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니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계속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그냥 괜찮은 일이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냥 다 괜찮아졌다고.


친구를 향한 마음이 이렇게나 견고해진 경험이 반가워서 고백하는 거라고.


둘 다 눈물을 글썽였다. 술 때문인지 우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퇴근한 J의 애인과 아보씨까지 합세해서 자정이 되도록 놀다가 결국 J는 자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쯤 되자 자잘한 인사대신 카톡으로 굵직하게 사랑고백을 주고받았다. 어쩐지 J와 한 계단을 올라간 것 같다. 방학 둘째 날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글/그림 버들 (@am.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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