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 Mar 03. 2024

미술관에서

바람이 통하는 거리


 아보씨와 나는 같은 캘린더 앱을 사용한다. 약속이 생겨 일정을 저장할 때 상대방을 태그 해서 약속의 내용을 공유한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하루만 약속을 정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그 룰이 당연한 것은 아니어서, 함께 보내는 그 시간도 데이트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졌을 때 캘린더 앱에 기록될 수 있다. 약속이 없는 날일지라도 하고 싶었던 일이 있거나 쉬고 싶을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연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고 결혼한 지 4년 차, 아직까진 서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리듬으로 꾸려나가는 인간관계, 취미 활동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편이다.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뚜렷한 둘이 만나기도 했지만, 나이를 꽤 먹고 만나서 각자의 영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도 해서이다.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정기적인 약속을 잡을 때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생활을 통제하는 느낌이 나지 않으면서도 매너 있게 느껴져서 귀엽다. 내 허락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은근슬쩍 동의를 구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이 사람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한국 근현대미술전을 보러 소마미술관을 갔었다. 마지막 굿즈샵을 둘러보며 아보 씨에게 어떤 그림이 가장 좋았냐고 물으니,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빛으로 가는 길>?”


 나는 흐뭇해진 얼굴로 찍어둔 한 장의 그림 사진을 내밀었다. 나도 좋아서 한참 바라봤던 방혜자 화백의 그림. 손을 잡고 그림을 보다가도 으레 손을 놓고 각자 보고 싶었던 그림 앞에서 머문다. 서로를 스쳐 거닐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우리는 철저하게 타인이 된다. 그 공간에서 우리 사이를 드나드는 바람으로 인해 환기가 되는 상상을 한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찾아 소곤거리며 공감을 구한다. 각자의 호흡으로 관람을 하지만 전시실을 옮길 때는 꼭 출구에서 기다렸다가 손을 잡고 다음 전시실로 함께 이동하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 룰이다. 미술관에서의 걸음이 우리의 결혼 생활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글/그림 버들


이전 05화 책이나 게임이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