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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지앵 Feb 06. 2024

격동의 시기에서 ‘스윽’의 시기로, 그리고 다시 격랑에

비전공자의 학예연구사 도전기

스토리 어딘가에서 밝혔는지 모르겠는데, 나의 격동의 시기는 아무래도 2020년 아니었나 싶다. 내 평생 40년 중 아마도 연필을 잡은 후로는 계속 공부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2020년에 드디어 펜을 내려놓았다. 23세 이후로 줄곧 18년 동안 따르고 존경하고 사모하던 지도교수를 ‘내가’ 버린 것이다. 그 끈질기게,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인연도 어느 짧은 순간 휘몰아치는 우연의 연속에 무너져 버렸다. 우연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겠지만, 나는 그것을, 지도교수와 그리고 나를 이간질하던 어떤 교수의 의도한 우연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 저러한 일로 천업으로 생각했던 공부를 그만두고, 최대한 빨리, 우선적으로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가진 것 없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바로 9급 일반 행정직 공무원. 공부하고 합격하는 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흔이란 나이에 2~30대 어린 친구들과 맞붙은 결과는 뭐, 전년도보다 3분의 1로 줄어버린 티오에도 합격했으니, 평타는 쳤다고 본다. 42명 뽑던 티오가 한 해 사이에 14명으로 줄어버렸고, 거기에서 또 느낀 것이, 나는 정말 운은 없다는 것.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좀 마음이라도 편한 시기가 오려나 했더니 이제는 사람이 말썽이다. 육아를 이유로 2년 임용 유예를 하고 나서 입직을 하니, 별, 참! 팀장 포함 네 명이 있는 팀에 네 명 모두 내가 사십 평생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캐릭터들이 들이었던 것. 특히나 네 명 모두 똑같은 캐릭터! 같은 캐릭터들이 모여 만드는 그 시너지는 막강했다. 우리 시 조직은 ‘~과’ 안에 몇 개  ‘~팀’들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의 과는 한 공간에서 업무를 보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 즉, 몇 개 팀들 모두 우리 팀을 대단히 독특한 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뭐 나라도 그렇게 봤을 거다. 대표적인 사례(사례라고 하면 뉘앙스가, 가끔 나타나는, 특별히 발견된 사건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상 내 팀원들의 일상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를 하루 시간 순으로 몇 개 들어 본다.


누가 먼저 ‘스윽’ 일어나면, 너도 나도 ‘스윽’ 일어난다.


나는 막내라서 그냥 눈치가 보여서 아침에 8시 30분 정도 되어서 출근을 했다. 과장님이나 다른 팀장들은 그때쯤이면 거의 출근해 있다. 평균적으로 일반 직원들보다 빨리 출근하는 듯했다. 출근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앉아 있으면 팀원들이 거의 9시 가까이 되어 출근한다. 나는 또 인사를 하고, 그들은 인사를 안 한다. 그냥 ‘스윽’ 지나간다. 팀장이 거의 제일 늦게 왔는데, 내 생각에는 팀장이 오면 팀원들이 일어서지는 않더라도 인사는 하지 않나? 인사도 안 한다. 내가 인사하면 또 그냥 ‘스윽’ 지나간다. 처음에는 나름 충격이었는데, 뭐 그러려니 했다. 업무를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다른 팀에서는 “뭐 먹으러 갈까?” 뭐 이런 달뜬 소리가 슬슬 들린다. 직장인이라면, 학생이라면, 사람이라면, 몇 시간 만에 찾아오는 휴식 시간, 배고픈데 다가오는 식사 시간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다들 기분이 좋다. 그런데 우리 팀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사내 메신저로 뭐 먹을지 물어본다. 메뉴판도 사진으로 보낸다. 답도 메신저로 보낸다. ‘저는 카레우동 먹겠습니다.’(가끔 육성으로도 묻긴 한다.) 코로나 영향으로 점심시간을 팀별로 탄력적으로 운영했다. 우리 팀은 12시 30분 식사. 즐겁게, 왁자지껄 식사하러 외출하는 다른 팀원들 덕에 우리는 아직 업무 시간이지만 약간 분위기가 느슨해지곤 했다. 12시 30분이 다가오면, ‘스윽’ 일어난다. 누가 먼저 ‘스윽’ 일어나면, 너도 나도 ‘스윽’ 일어난다. 팀장도 ‘스윽’ 차석도 ‘스윽’, 옆에 내 사수도 ‘스윽’. 스윽스윽 슥슥. 빠르게 신기 어려운 신발을 신고 가는 날에는 팀원들을 놓치는 일도 생겨난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말로,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전화하고 식당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는다. 옆 자리에는 먼저 나온 다른 사람들이 점심 시간을 즐기고 있다. 직장인들에게 1시간의 점심시간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정말 1분 1초가 즐겁고 아깝고 아… 즐겨야 하지 않은가!??? 우리 테이블은, 적막강산이다. 말을 안 한다. 다섯이 앉아서 정말 말을 안 한다. 말을 안 한다. 말을 안 해. 왜 말을 안 하지? 말을 안 한다. 멀뚱멀뚱, 눈만 꿈뻑꿈뻑. 물만 홀짝홀짝. 팀장이랑 동갑이라서 실없는 소리라도 하면, 그냥 ‘스윽’ 웃는다. 말을 안 하고 있다 보면 이미 예약해놓은 밥이 나온다. 밥을 먹는다. 밥상머리에서 떠드는 거 아니라고 아버지께 꽤나 야단맞으며 배웠다만, 말을 안 한다. 밥도 맛있게 먹는 것도 아니다. 꾸역꾸역 먹는다. ‘니들이 여기 오자고 했잖아!!!!’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 대충 다 먹으면, ‘스윽’ 일어난다. 누가 먼저 ‘스윽’ 일어나면, 너도 나도 ‘스윽’ 일어난다. 팀장도 ‘스윽’ 차석도 ‘스윽’, 옆에 내 사수도 ‘스윽’. 스윽스윽 슥슥. 팀 총무가 계산하고 “커피는 어디서?” 묻는다. 점심시간 처음으로 말한다. 그럼 어느 한 명이 굉장히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낸다. “빽다방 가시죠…” 그럼 가타부타 말도 없다. 누가 먼저 ‘스윽’ 빽다방으로 향하면, 너도 나도 ‘스윽’ 간다. 팀장도 ‘스윽’ 차석도 ‘스윽’, 옆에 내 사수도 ‘스윽’. 스윽스윽 슥슥. 그런데 남들이 보기에도 좀 심각해 보였나 보다. 나에게 식당 사장님이 “싸웠어요?” 물어본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시청 옆 빽다방은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려는 직원들로 꽤 북적인다. 그래서 자리가 없을 때도 있는데, 나는 그냥 들어가고 싶은데, 기어이 커피는 마신다. 서서 자리 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린다. 아, 커피 시킬 때는 이야기한다. 자리가 나면, 누가 먼저 ‘스윽’ 자리로 가고, 너도 나도 ‘스윽’ 가서 앉는다. 팀장도 ‘스윽’ 차석도 ‘스윽’, 옆에 내 사수도 ‘스윽’. 스윽스윽 슥슥. 커피가 나오면 말 없이 마신다. 이제는 좀 입이 풀렸는지 한 두 마디씩 한다. 난 기뻐서 말을 많이 한다. 친해지고도 싶고, 내가 누군지나 알리고, 나도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아야 앞으로 같이 일을 할 것 아니냐 말이다. 그런데 빽다방에서 대화도 또 지들 끼리끼리 한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건, 팀장과 나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 여자는 같은 팀에서 꽤 오랜 기간 같이 업무를 했었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때가 되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스윽’ 하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퇴근 때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되고, 퇴근할 때에도 ‘스윽’은 이어진다. 내가 본 드라마에서는 “팀장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내일 뵈어요!” 하고 가던데. 이거에 적응, 아니 이걸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하는 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정말 답답하고, 답답하고, 답답하고, 끔찍한 하루하루였다.


‘스윽’을 이해할 때쯤 나는 신규 교육에 한 달 일정으로 참여해야 했고, 거기서 다시 격랑으로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학예연구사가 되어야겠다.



p. s. ‘스윽’은 ‘스으~윽’ 이런 느낌이다. 즉, “모두 다 손 머리에 두고 눈 감아! 오늘 상우 지갑 가져간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라. 일어나면 이 일은 없던 일로 한다.” 하고 선생님이 얘기하고 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누군가가 친구들이 내가 일어난다는 것을 못 느끼기를 바라면서 ‘슬며시’ 일어나는 바로 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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