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신 가져 오니라!!”
시골에 살 적에 할머니가 두통이 생기면 하시던 말씀이다. 이때 뇌신은 ‘뇌선’이라는 가루약이다. 아이 손바닥만 한 얇고 하얗고 네모난 종이에 흰 가루가 엄지손톱만큼 들어있는 진통제다. 약국에서 알약을 빻아서 가루로 소분하여 그렇게 파는지 아니면 제약회사에서 이미 그렇게 포장되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한 봉지씩 접어서 포장되어 있었다. 습자지나 한지 같은 자그마한 종이에 가루약을 놓고 반절선 아래에서 접어 올리고 양쪽 날개를 포개어 접는다. 위쪽으로 남은 날개 모서리를 아래로 꺾어 양쪽 날개 포개어진 사이로 끼워 넣는 포장법이었다. 생선 비늘처럼 촘촘히 박힌 흰 약봉지가 안채 마루 끝 찬장 안에 늘 준비되어 있었다.
“아휴, 한 첩 먹고 나니 살 것 같다.”
그 시절 뇌선은 우리 집 만병통치약이었다. 두통, 치통, 근육통 온갖 통증을 짊어지고 사는 시골살이 가정상비약이었다.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그 한 봉지를 입안에 털어 넣고서 물 한 모금 삼키고 나면 어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앓는 소리를 감추곤 했다. 감기몸살에도 뇌선을 먹을 정도였으니 해열진통제를 넘어 만병통치약이 맞다.
엄마는 체격이 좋았다. 많은 집안일은 엄마처럼 튼실한 몸도 버텨내지 못하기 일쑤였다. 가장 잦은 현상이 두통이었다. 두통 원인은 다양하다. 영양이 부족할 수도 있고, 과로나 스트레스, 감기 등 여러 방향으로 역추적해 볼 수 있다. 집에 딸린 식구를 챙기며 하루를 보내기에 바쁜 아낙들은 대부분 그냥 ‘아픈 것’ 하나로 통일했다. 처방도 간단히 ‘뇌선’ 하나였다. 만족도 역시 아주 높았다. 그저 위에서 눌러 잠재우려는 정치 풍조와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가 맞물린 그 시대 통증 해소법도 그랬다.
증조할머니는 민간요법의 대가셨다. 손가락을 따거나 손수 만드신 화풍단으로 소화불량 체기를 다스리는가 하면, 어떨 땐 꽉 막힌 명치끝을 숨이 멎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치료하셨다. 등줄기를 쓸거나 척추 마디마디를 눌러 통점을 찾아 갈퀴처럼 억센 손으로 문지르면 그간의 괴로움이 아쉬울 정도로 조금 전 엄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십구 세기에 나신 증조할머니 손끝으로 전해지는 조상의 지혜와 숨결이다. 가족을 챙기고 책임지는 가모로서 익혀야 할 가정 상비법이자 천 년을 내려온 집안의 몸 사랑법이었다.
보건의료환경이 열악한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유치원교사를 하셨던 작은어머니는 시대를 앞서가는 동네 지도자셨다. 군 부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청와대까지 가서 표창장과 봉황이 새겨진 시계를 몇 차례 받아오셨다. 부녀회를 소집하여 요리 강습을 하는가 하면 임신 육아 강좌 등 다양한 교육을 진행했다. 조국 근대화 끄트머리에는 집집마다 부업거리를 안기기도 했다. 동네 약국이 없어지고 이십 리 멀리 박약국까지 다니기 힘든 주민을 위해 동네 간단한 진통제나 종합감기약을 준비해 두셨다.
엄마는 두통이 잦았다. 시골에서는 할머니와 뇌선을 공유했다.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두통 증세가 나타났고, 아무리 거부해도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시내 변두리로 이사 온 이후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산더미처럼 일이 밀리면 어김없이 증세가 찾아온다. 소화불량과 두통이 기본이다. 엄마는 변함없이 진통제로 눌렀다. 진통제도 종류별로 줄을 섰다가 가장 약발이 센 녀석이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다. 맺힌 것을 풀어서 해소하거나 치료하지 않고 진통제 처방처럼 꾹꾹 누르고 산 세월이었다. 두통이 쌓여 고혈압이 되었을까. 말년에 엄마를 고생시킨 녀석은 고혈압이었다. 젊어서 일하며 번 돈은 모두 노년의 약값이라는 말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었다.
보건소에서 전화가 오고 고혈압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지만 엄마는 거부했다. 한 번 먹으면 평생 복용해야 한다는 말에 기겁하고 말이다. 꾸준히 먹을 자신이 없고 평생 나갈 약값이 무섭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책 없이 최대한 거부하며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어느 날 쓰러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땅과 하늘이 맴을 돌고 후딱 뒤집히더라. 옆에 있는 기둥을 잡을라캐도 순식간이라 어쩔 수가 없더라”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다. 때마침 저녁 무렵에 이웃집 아지매가 저녁 지을 쌀이 조금 모자라서 빌리러 왔다가 발견했다. 덕분에 가까운 곳 병원이송도 빨랐고 회복하려는 엄마 의지도 치열했다. 반신이 마비되었지만 당신의 여생이 처량해지기 싫었고, 딸 고생시킬 일은 생각만 해도 먹먹했다고 회상하셨다. 병원 복도에서 걷기를 밤낮으로 끊임없이 연습하셨고 열흘 뒤 퇴원할 때는 두 발로 걸어서 병원문을 나섰다.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며 놀랐다.
“병원에서 환자를 숱하게 봐왔지만 이렇게 완전히 회복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환자분처럼 본인 두 다리로 반듯하게 걸어서 집으로 가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
퇴원할 때 의사 선생님이 주신 축하와 칭찬을 섞은 인사말이다. 그 내용을 고스란히 귀에 담았다가 수시로 꺼내어 자랑하며 뿌듯해하셨다. 젊은 시절 홀로 어른들 모시고 살며 잘 버텨낸 세월에 대한 자부심도 컸지만, 기적 같은 건강 회복으로 또 한번 인생 신화를 만들었다. 당신의 강한 의지력과 기도의 힘, 주변의 돌봄과 중보 기도에 감사하며 다시금 불끈 힘을 다지곤 했다.
학생 중에는 의대를 간 경우도 있었다. ’80년에는 작은이모, 그 이듬해에는 큰이모가 줄줄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 와중에 엄마는 복막염으로 수술을 했고 다음 해에는 장질부사 즉, 장티푸스를 앓았다. 온 식구가 보건소에 가서 대소변 검사를 했다. 한 학생이 보균자였다. 주말에 집에 갔다가 웅덩이가 있는 논에 거름을 나르고 와서 묻혀온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 신체 건강한 학생들은 멀쩡했고 제일 면역력이 약한 엄마가 발병한 것이다.
“다음에 아프시면 제가 잘 돌봐드리겠습니다.“
의대를 합격하고 건넨 감사의 인사말이었다. 그때 미안한 마음을 감사의 언약으로 답했는지도 모르겠다.
입학 후에는 예과임에도 생쥐 실험을 하고 누나 집에서 다락방으로 쫓겨난 얘기며, 생쥐 해부하다가 쥐 시체랑 잔다는 둥 의대생의 고된 일상을 와서 풀어놓곤 했다. 건강과 관련된 건 뭐든지 물어보라고 해서 내가 건넨 말은,
”아재. 협심증이 뭔데예?“
친척집 아들이라서 나는 아재라 불렀다. 그 무렵 우리 집 건강 관련 초미의 관심사는 두통이었다. 엄마를 괴롭히는 통증이 모두 두통이었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나의 질문은 협심증이었다. 협심증은 마음이 좁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관이 좁아져서 생기는 병이라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역사 속 한 장면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때 나는 왜 두통의 원인이나 관리법을 묻지 않고 협심증을 질문했을까.
엄마를 마지막에 쓰러뜨린 병명도 협심증이다. 내 인생 아주 아주 작은 숙제였는데 그걸 모르고 살았다. 인생을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다가 기억을 거꾸로 되돌려보면 이런 순간이 미리 앞날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을 알려주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나님인지, 조상님인지, 하나의 영적 공동체인지...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의 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