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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Oct 23. 2024

3-6.다시 듣지 못할 엄마의 노래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으로 시작하는 가요가 있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가끔, 아주 가끔 노래를 흥얼거렸다. 밤이 긴 겨울이나 농번기가 끝나고 하루가 자라난 손톱만큼 길어지기라도 하면 그런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꺼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 날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 꺼야.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꺼야.      

잊을 수는 없을 꺼야. 

잊을 수는 없을 꺼야.”      


이 노래는 패티김이 1973년에 불러서 히트한 곡이다. 남편 길옥윤이 노래를 만들고 아내 패티가 불렀다. 1966년에 결혼한 둘이 별거하고 있을 때 길옥윤이 패티한테 보낸 곡이다. 뉴욕에 머물 때 곡을 지어서 전화로 끝까지 불렀다고 한다. 길옥윤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잊을 수는 없을 거야. /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라는 처음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아내 패티김의 뜻을 반영하여 ‘이별’로 발표했다고 한다. 이후 둘은 헤어지고 ‘이별’곡은 전 국민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이혼곡이 되었다. 1973년 즈음의 풍경이다. 길옥윤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라 지었고, 패티김은 ‘이별’로 불렀고, 엄마는 ‘잊을 수는 없을 꺼야’로 읊조렸다. 


엄마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엔 그랬다. 언제나 구김살 없이 늠름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겨울 깊은 밤 가끔 입안에서 옅고 잔잔한 가락으로 중얼거릴 때는 있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까지는 가사를 들을 수 있어도 그 뒷소절은 꼬리를 감추곤 했다. 그저 옆엣사람 귀에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혼잣말처럼 가사나 가락이 끊어질 듯 숨어들었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냉정한 사람이지만’에서는 가사가 또렷하게 들리다가 또 흐려지기를 반복하다 마지막 ‘잊을 수는 없을 꺼야’는 분명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거야’이지만 ‘꺼야’라고 힘주어 마무리했다. 두 번씩. 끝부분에서는 항상 두 번씩 반복했다. 강한 다짐을 가슴에 새기듯이. 


도시로 분가한 시절에는 집안 아지매들과 계모임을 했다. 목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계를 조성하지만 집안 동서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목적이 더 컸다. 한 달에 한 번씩 이집 저집 순서를 정해 돌며 음식을 장만하고 모여서 근황을 나누고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을 다졌다. 가끔은 외식을 하고, 간간이 여행을 가기도 했다. 울릉도 여행, 용인 자연농원 관광, 계곡 물놀이는 바로 그때였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시절 핫플레이스였던 노래방도 갔다. 남강 다리를 건너 배 너머 마을 강남동으로 걸을 때는 미리 노래 연습도 했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혼자 걷는 이 마음...’ 주현미의 이 노래가 그때 정해진 엄마의 애창곡이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모르실 거야.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

하염없이 걷고 있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

잊어야지 하면서도 못 잊는 것은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 봐.


가사를 다시 적어 보면서 그 내용과 마음을 짚어보고 싶었다. 가수의 높은 콧소리 울림은 없더라도 그 구슬프고 애잔한 마음은 엄마 목소리가 더 깊었다. 


엄마가 만나러 가는 집안 아지매들은 다 살만했다. 시내에 주유소와 사슴 농장이 있거나, 부부교사이거나, 시연합회장이거나 유치원장이거나, 가게를 운영하거나... 그런 손윗동서들을 만나러 가는 엄마는 남자 고등학생들 하숙을 쳤다. 개의치 않았다. 각자 나름 제 인생길이 있음을 일찍 깨친 엄마다. 무엇보다 어른들을 모시고 산 긴 세월이 있고, 그래서 집안 내력과 형편을 누구보다 꿰고 있는 엄마다. 시어른들 말씀을 듣고 섬기며 살았기에 늘 당당하고 떳떳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그랬다. 


아침에 우연히 만난 노래 한 소절로 엄마 노래가 하루 종일 귀에 쟁쟁거린다. 밤비 내리는 남강교를 목을 길게 빼고 ‘영동교’와 ‘잊지 못하는 마음’을 웅얼리며 홀로 걷는 엄마가 눈에 밟히는 하루다. 


엄마가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는 찬송가도 자주 흥얼거렸다. 교회를 오가는 길 위에서도, 집안일을 할 때도, 옥상 채소를 돌볼 때도 그랬다. 기분이 좋을 때나 또 기분을 달랠 때도 찬송가가 엄마 주위에 흘렀다. 한 나이라도 젊었을 적에는 음정과 가락이 살아났지만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찬송가도 가사만 띄엄띄엄 들렸다. 그중에서도 최애 찬송은 370장이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엄마가 마지막까지 자주 불렀던 찬송이다. ‘내 앞길 멀고 험해도’ 영원히 따르려고 했던 주님이 엄마한테는 어떤 분이었을까.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일까. 불완전한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이었을까.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는 현실적인 위로자였을까. 천국 갈 때까지 잊지 못할 지아비였을까. 


엄마가 가시던 그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공포가 가득했다. 모두 집 안에 갇힌 시간을 살았다. 그런 중에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홀로 지내던 엄마한테는 한적한 외로움을 달랠 한줄기 즐거움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방문하던 나는 금요일에는 어김없이 들렀다. 전날 밤 방송에서 인기 있었던 노래를 얘기하며 핸드폰 영상으로 자막을 켜고 같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고립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더 우울해 보였다. 한번은 ‘희망가’를 내가 먼저 시작했다. 가사가 보이는 화면을 사이에 두고 같이 부르고 싶었다. 노래 가사로 엄마 마음이 위로가 될 것 같아서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엄마는 슬픈 곡조가 싫은지 고개를 돌리며 다른 노래가 더 좋다고 했다. 


“그것보다는 ... 정동원이 부르던데...  전화기는 충전을 잘하면서 나는 충전하지 못한다카던가... 그 노래 한소절, 한소절이 우찌 그리 내 인생하고 딱딱 맞는지... 니도 함 들어보거라. 니도 꼭 들어보모 좋겄더라...”


검색해 보니 ‘여백’이었다. 


‘...청춘은 붉은색도 아니고 사랑은 핑크빛도 아니더라

마음에 따라서 변하는 욕심 속 물감의 장난이지

그게 인생인 거야

전화기 충전은 잘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마지막 남은 나의 인생은 아름답게 피우리라.’


훈장처럼 주름진 손, 늙어가는 게 슬픈 것도, 핑크빛으로 마냥 곱기만 하던 사랑도 아니었음이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음속 욕심도 이젠 물감으로 얼룩진 장난처럼 여겨지는 시간. 딸이 사는 일상이나 엄마가 평생 지나온 삶이 자신을 위해서는 충전하지 못하고 늘 쫓기듯 사는 꼴이어서 안타까웠음이다. 마지막은 아름답게 피우고 싶다고 외친다. 핸드폰으로 보는 영상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그 가사가 품은 뜻이 며칠 후 생을 마감할 엄마한테는 어떤 울림으로 새겨졌을까 싶다.


“요새는 유행가도 안 불러지더라. 요새는 ... 요새는 그런 노래는 못 부르겠더라. 늙어서 그런가 노래가 안 되더라. 흥얼거리지도 못한다. 찬송가나 쪼맨 중얼거리쌓다가 말지...”


딸이 들은 엄마 노래는 그날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주일 예배 페회송 가사를 떠듬떠듬 주워섬기며 나직이 반복하던 목소리가 마지막 엄마 노래였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날에 흠 없기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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