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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May 28. 2024

3-5. 사우디 아지매와 커피 할머니

엄마 친구

사우디 아지매는 엄마 봉래동 첫 친구다. 남편이 사우디로 ‘돈 벌러’ 간 집 아내라서 다들 그렇게 불렀다. 엄마보다 나이는 몇 살 많았지만 늘 일상을 함께하고 뜻이 잘 맞는 친구였다. 학생들 반찬으로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를 때 사우디 아지매는 척척 일주일 식단을 짜서 주었다. 주된 반찬과 밑반찬으로 준비하면 된다며 요일별 식단을 짜며 시장갈 때도 항상 동행했다. 그러니까 두 집은 같은 반찬으로 일주일을 지내는 두 지붕 한 집 같은 사이였다.


시장에도 물건값이 천차만별이었다. 어디가 물건이 좋고 값이 저렴한지 중앙시장 물정을 누구보다 꿰고 있는 분이었다. 지역에서 여고를 다니고 결혼도 여기서 했으니 현 실정뿐만 아니라 시내에 떠돌아다니는 소문 보따리도 간간이 풀어놓으며 엄마를 즐겁게 했다. 저기 대궐 같은 집은 어느 병원장 셋째 부인이 산다느니 언제 왔다 간다느니... 여고 동창들 모임에 가면 시내 모든 사정을 한 보따리 모아서 오는 아지매였다. 도란도란 얘기 소리와 시장바구니를 끌고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엄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우디 아지매는 엄마랑 죽이 잘 맞았다. 아는 것도 많고 당찼다. 연탄보일러를 온수 보일러로 바꿀 때 공사도 같이 했다. 먼저 자재를 사 와서 측량과 시공을 척척 하는 쪽은 그 아지매였다. 모래를 깔고 온수 호스를 배열하고 시멘트를 바르는 등 모든 절차를 지휘하고 엄마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됐다. 하지만 물이 잘 돌지 않자 다음에는 시공업자에게 맡겼다. 어쨌든 아낙 둘이서 집 설비 공사를 감행한 것이 용감했다. 남자 없는 집에 여성이 가장이 되고 엄마가 되는 일인이역을 하던 시절의 두 분이었다.


지역 명문 여고를 졸업한 분이라서 배움과 나이는 엄마와 차이가 있었지만 두 분은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며 가까이 지냈다. 아이들 학교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시면 남편이 보내준 사우디 로렉스 금시계가 선물로 좋다고 했다. 장난기 많고 짖궂은 남자 담임 선생님들은 가정방문 전에 상담한 후 미리 아이를 통해 기호품을 일러두기도 했다. 자녀를 둔 엄마들은 뭔들 선생님께 안 드리고 싶겠는가. 맛나고 진귀한 것, 기둥뿌리라도 뽑아서 가정방문을 하시는 선생님께 모두 챙겨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두 분은 이런 정보 나눔도 웃으면서 즐기는 대화였지만 곁에서 듣고 지켜보는 나는 달랐다. 시골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면 집에서 할아버지 곁에서 인사를 받다가 살림이 변변찮은 도시 변두리로 내몰리면서 천하에 가여운 처지가 된 것이다.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국면이다. 힘들게 혼자서 살림을 꾸리는 엄마한테는 스쳐가는 담임 선생님 가정방문이 다행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멀미가 잘 정도로 몸살을 겪어야 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나의 사춘기였고 엄마의 ’80년 봄이었다.


사우디 아지매는 아이들 진학 문제와 공부 상담을 언니처럼 이끌기도 하고 친구처럼 의논했다. 그저 힘이 닿는 대로 도우려 했고, 조곤조곤 위로하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익한 정보와 실질적인 혜택을 안겨주는 분이었다. 그분이 서울로 이사 간 이후 허전함을 달래느라 엄마는 한동안 힘들어했다. 이런 날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다. 혼자 잘 살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외롭고 힘든 이웃을 챙길 때 더불어 따뜻해지는 삶이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때 거듭 배운 것 같다.

 

사우디 아지매가 떠나고 집을 지으면서 엄마 봉래동 살이도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친구도 많아지고 동네 아지매들끼리 계모임도 했다. 같이 하숙집을 하거나 나이가 비슷하거나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이 친구가 되었다. 같이 모여서 놀거나, 여행을 함께 떠나가거나, 제삿밥을 모여 앉아 나눠 먹기도 했다. 손자나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가 된 아지매들은 아이들을 한둘 데리고 다녔다. 엄마도 손녀를 데리고 다니며 아이가 제사 음식 중 탕국을 잘 먹는다며 새로운 발견인 양 눈빛을 반짝이며 일상을 전했다.


그 손녀는 그러니까 우리 딸은 사람마다 이름을 잘 지었다. 함께 먹었던 음식을 중심으로. 고기를 같이 먹으러 갔던 아빠 직장 동료는 고기 아저씨가 되었고 매일 커피를 타서 들고 놀러 오는 아지매는 커피 할머니가 되었다. 커피 할머니는 엄마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렸지만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 작은 외삼촌이랑 동갑이라며 엄마는 동생처럼 챙겼고 커피 할머니는 언니처럼 잘 따랐다. 새집을 매입할 때도 엄마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결혼할 시기가 되면서 반듯한 큰 집이 필요하다는 말에 수긍한 것이다. 삼 남매 결혼을 삼층 짜리 벽돌집 새집에서 모두 성사시켰다.


커피 할머니는 성격이 유순하고 말수가 적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엄마와 마음이 맞고 잘 통했다.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더러는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엄마는 그런 주의까지 다른 이들한테 일렀다. 딸한테는,


“생일도 니하고 같고 잘 토라지는 성격도 니랑 꼭 닮았다.”


라며 껄껄 웃으셨다. 가끔은 자녀들 살림 이야기로, 손자들 공부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 경쟁 전선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사는 가운데 아로새겨지는 애틋한 무늬다.


어른들 사는 모습은 다들 그렇다. 맛난 것이 있으면 같이 먹고, 함께 놀고, 자녀들 이야기 나누고, 아픔도 슬픔도 나누며 저물어가는 시간이다. 그 석양에 발갛게 서로서로 스며들었던 노을 같은 분들이다. 구부정한 허리로 싱가 재봉틀에 앉아 속바지를 지어서 나누고, 동네 뒷산을 누비며 훑어온 쓴 나물로 반찬을 나누며 함께 익어가는 동행이었다. 국수를 말아서 벗 삼아 호로록거리고 도토리묵에 줄무늬를 새기며 묵사발을 뎁히던 좁고도 따순 길이었다.


봉래동 살이 사십 년. 엄마한테 친구는 많았지만 유난히 두 분은 선명히 가슴에 새겨진다. 낯설고 힘들 때 든든한 언니 같았던 사우디 아지매, 즐거운 일상을 함께 나누었던 커피 할머니. 친구분 중에는 먼저 떠나거나 뒤따라간 분도 있지만 두 분은 아직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화 연락을 하거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어딘가 알지 못할 곳에서 엄마 흔적을 묻히어 나타나는 듯하다. 아직도 그 어디에는 엄마가 남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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