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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May 28. 2024

3-3. 죽어지모 썩어질 몸

엄마의 부업

3-3. 죽어지모 썪어질 몸 

엄마는 하숙만으로는 살림이 빠듯했다. 겨우 밥만 먹고 살 정도였으니, 젊고 힘이 넘치는 엄마는 잠시라도 손을 가만히 놓고 있지는 않았다. 큰어머니가 하시는 부업을 따라서 이것저것 했다. 큰아버지는 교원이셨지만 그 당시 객지에서 사립대학을 다니던 언니, 오빠 둘 뒷바라지는 만만치 않았다. 사 남매를 공부시키려면 큰어머니 부업은 피할 수 없었다.


큰어머니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부업을 하셨다. 재봉틀로 면장갑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엄마한테도 알선해 주셨다. 공장에서 면장갑 모양대로 잘라서 한 포대 갖다 부려놓으면 먼지를 털고 집에서 재봉틀로 장갑 손등에 줄을 박았다. 한 줄과 세 줄. 수고비도 세 배로 달랐다. 먼저 먼지를 탈탈 털고 싱가 재봉틀에 앉았다. 하루 종일 싱얼싱얼 페달을 밟고 드르륵 드르륵 노루발이 달렸다.


면장갑일도 오래 할 일은 못 되었다. 긴 시간 앉아서 코를 박고 하는 일은 젊은 어머니들한테도 고된 노동이었다. 이후에 큰어머니는 시내에서 부녀회 회장을 하시면서 연탄 가게도 운영하셨다. ’80년대 초. 그 당시 연탄은 집집마다 주방과 난방용 주 연료였다. 한 번 주문에 오십 장, 백 장씩 들여놓고 겨울을 났다. 처음에는 리어카에 싣고 나귀로 배달하다가 주문이 많아지자 일꾼을 부리며 다른 부업은 접으셨다. 유치원 운영을 하시면서부터는 다른 일은 모두 접으셨다.


엄마는 밤 깎는 일을 이웃집 사우디 아지매와 같이 시작하고 마쳤다. 오 키로, 십 키로, 이십 키로... 누가 더 많이 하나 내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경쟁하기도 하며 열심이었다. 능률이 오르면 밤잠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강행했다. 가을철 한때 부업인지라 집집마다 아낙들은 집안일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밤 깎는 일에 열심이었다. '80년대 수출 역군 주부들의 풍경이다.


겉껍질을 벗기는 칼은 과도처럼 무딘 칼날이었다. 한 차례 껍질을 벗기고 나면 알밤을 감싸고 있는 속껍질 보늬를 깎는 일이 주된 일이다. 최소한으로 깎아버리고 알맹이를 최대한으로 크고 깔끔하게 각진 모양으로 완성해야 한다. 칼등의 압력을 둔감하게 하려고 볼펜을 잘라서 끼우기도 하고, 손 닿는 데는 헝겊으로 감싸는 요령도 터득하면서 다들 속도를 내었다. 요즘은 모두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아낙들 고운 손으로 한 톨 한 톨 깎아 생산하는 정성스러움이 있었다.


해마다 초가을, 추석이 되기 전부터 시작한 밤 깎는 일은 초겨울이나 크리스마스 전까지 했다. 하숙집을 하면서도 서너 달 애쓰고 나면 여기저기 집을 손볼 만한 돈이 모인다. 그 돈으로 보일러 수리도 하고 방을 확장하기도 하고, 옥상을 올리기도 했다. 한 해는 장롱이나 냉장고를 사고, 다음 해에는 화장대를 맞춰 넣고, 부엌 싱크대를 바꾸는 재미로 가을이면 신나게 밤낮을 저당 잡히며 칼자루를 쥐고 알밤을 깎았다.


“죽어지모 썪어질 몸.”


시골에서 어른들 모시고 살 때 증조할머니 생활신조였다. 십구 세기에 태어나신 증조할머니랑 엄마는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말씀을 뼛속까지 새긴 것처럼 온몸으로, 온통 삶으로 증명해 보이셨다.


밤이 나오는 계절이 지나면 겨울에는 도라지를 깠다. 한 다리이씩 시장에서 배달해 오면 안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을 섞어 아지매들이 둘러 앉아 도라지향을 피웠다. 도라지가 뜸해지면 멸치 내장 손질하는 부업도 했다.


그 일은 쉽지 않았다. 물리적인 힘은 덜 들었지만 멸치 잔가시가 손톱이나 손가락 살갗을 찌르거나 박히면 머리카락이 쭈삣 서도록 아픈 일이었다. 바라보는 딸은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도 청승이요. 뭐할라꼬 이런 것까지 하시요?”

“너그 아아들 과자값이라도 벌어야제. 놀모 뭐 하끼고.”


그러면서 몸을 쉬게 두지 않으셨다. 매일매일이 성실했고, 매순간이 최선이었다. 심신이 힘든 순간도 이를 악물고 독종으로 견디는 모습은 ‘녹슬지 않고 닳아서 없어지리라’라는 각오로 사는 듯했다. 가슴에는 사랑과 희망을 품고, 몸은 닳아서 없어질 각오로 말이다. 


봄에는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따는가 하면, 여름에는 배밭에 가서 배를 봉지봉지 싸기도 했다. 가을에는 감밭에서 사다리를 타며 단감을 딸 때도 있었다. 공설운동장 조성하는 데 가서 잔디를 심기도 하고, 포도가 익기 시작하면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북으로 봉고차를 타고 경북까지 며칠을 다녀오기도 했다. 급기야는 자칭 예수쟁이면서 부처님 오신 날 절에 가서 음식을 장만하는 일도 어느 날 하루 거들고 오셨다. 


“엄마는 예수쟁이가 맞소?”


라는 딸의 반문에,


“그래, 인자는 안 갈끼다.”


라며 피식 웃으셨다. 


‘남편 없고 아들 없는 여자의 삶’. 엄마는 수시로 그렇게 되뇌이며 허리를 곧추세우셨다. 딸한테는 기대어 짐이 되기 싫고 당신 의지와 노력, ‘하면 된다’라는 신념으로 운명을 개척하신 인생 여정이었다. 의식주는 최소한으로 절제했다. 그야말로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사는 수도승의 삶이었다.


“팔자가 무신 말고.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들어가는 기라. 지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아야지... 운명이 있다고 해도 안 움직이모 없는 기라. 감나무에 달린 홍시도 내 손으로 따야 먹을 수 있는 기다. 복 많은 사람이 백을 가질 운명이고 가난한 운명인 사람이 열을 가질 운명이라 캐도 열심히 해야 열은 누릴 수 있는기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배움이 적은 여성 혼자서 살기에는 녹록잖은 시대였다. 하지만 엄마는 벼락같은 운명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때로는 물 흐르듯이 부모와 자식을, 이웃을 섬기는 사명에 순종하며 사셨다. 피와 땀으로 젖은 소박한 소득은 어머니 스스로 일어서게 했고, 일평생 걸은 발자국으로 세상에 희망을 새기셨다. 그때 보았다. 의기찬 당신 모습이 다른 사람까지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고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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