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와 자전거
’80년 이른 봄. 새 군부정권이 들어설 때 엄마도 기나긴 시집살이를 끝내고 하숙집을 시작하셨다. 나는 중학생이 되고 엄마는 서른여섯이 되던 해. 배움이 짧고 돈 계산이 느린 엄마는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그 시절 벌이가 좋았던 시내 중앙시장 어시장도 있고, 동네 적당한 가게 하나만 열어도 먹고 살기는 아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혼자 사는 여자가 밖에서 흉한 꼴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바도 컸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조용히 사는 쪽으로 길을 잡으셨다.
말은 항상 씨앗을 뿌리는 법이다. 작은집 아재가 명절이나 행사 때 시골에 오시면, 봉래동 아재 집에서 하숙집을 하면 어떻겠냐며 운을 떼곤 하셨던 게 씨가 되었다. 당장 실행은 하지 않더라도 엄마는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고 어른 두 분이 돌아가시고 딸을 따라 객지로 나오자 드디어 감행한 일이다.
엄마는 결혼 전에 한동안 부산 작은할아버지댁에서 산 적이 있었다. 결혼 이후 십오 년 줄곧 시골 시집살이 후 도시로 분가했지만 그 생활이 낯설지는 않았다. 사회성 충만한 엄마는 새로 사귀는 동네 또래 아줌마들과도 스스럼없이 금방 친해졌다. 시댁 고향과 인연 깊은 집이 더러 있었기에 적응은 순식간이었다. 되레 이주민이면서 원주민보다 더 앞장서서 움직였다. 문제는 학생들 반찬이 어른들 반찬과 달라서 연구와 고민을 좀 하셨을 뿐이었다.
반찬은 소박했다. 계란프라이나 김치와 나물, 생선구이, 부침개, 국, 찌개 정도였으나 엄마 음식 솜씨가 좋은지 학생들은 늘 밥을 후딱후딱 잘 먹었다. 얼굴이 어두워지고 입이 샐쭉해지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딸밖에 모르던 엄마가 누구보다 아끼는 딸한테 먼저 밥상을 차려주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정성을 쏟는 상황은 참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내 몫의 반찬은 따로 담아 놓았다면서 기분을 맞추어 가며 달랬다.
엄마 집은 하숙집으로서 인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두 명이 있었다. 이사 가는 하숙집 아주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그 집에 그대로 남았다. 처음에는 두 명에서 시작했다. 방 두 개에 두 명씩 혹은 여섯 명이 같이 지내기도 했다. 우리 식구가 적어서 학생들은 편하게 생활했다. 공부를 잘하고 착실한 학생들이 찾아 들었고 인기 있는 하숙집이 되었다. 입시 특별반에 선발되어 학교 기숙사에서 합숙하던 학생들이 짐만 두고 지내겠다며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한 해를 홀로 지내시고, 또 한 해는 양자로 간 작은아들 집에서 지내시던 할머니는 다시 엄마한테로 오셨다. 예전처럼 막내며느리와 일 년을 지내시고는 방 하나를 차지하면 며느리한테 부담이 됨을 눈치채시고는 가까이 있는 큰아들 집으로 가셨다. 비록 사돈지간에 같은 방을 쓸지언정 거처를 옮기겠다고 자청하셨다. 그 일을 두고 엄마는 역시 할머니가 책을 많이 읽으셔서 지혜롭고 사리가 밝은 분이라고 회고하셨다. 이후로도 할머니는 천식으로 색색거리면서 걸어오시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다녀가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는 사진첩에서 중요 가족사진을 골라 큰집으로 옮기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마지막 걸음을 어떻게 아셨을까 싶다.
엄마는 학생들을 아들처럼 아끼며 정성을 다해 챙기셨다. 검실검실 큰 고등학생들이 예뻐서 산딸기를 사서 너른 양푼에 담아 숟가락을 꽂아주면, 학생들은 볼살을 볼록거리고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만 들리도록 열심히 잘 먹었다. 반찬도 고급진 음식은 아니어도 양이 부족하게 차리지는 않았다. 넉넉한 엄마 마음이 전해졌는지 학생들 집에서는 갖가지 농수산물을 가져오기도 하고 마치 한 가족인 것처럼 편하게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학생은 든든한 큰아들처럼 엄마 살림살이와 미래를 의논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혈육처럼 너무 편하게 지내다가 등짝 스매싱을 당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의엄마를 하자면서 찾아오는 학생과 학부모도 있었다. 그 인연으로 졸업하고 결혼한 후에도 연락하며 지냈다.
무엇보다 졸업한 학생들이 뜻한 바를 이루고 금의환향하듯이 소식을 안고 오면 어깨를 으쓱거리며 동네 순회를 했다. 계모임에서는 마치 친아들처럼 누구누구는 무엇을 하고 누구는 어떻게 살고... 자랑거리가 끊이지 않는 재미가 컸다.
어느 철학관에서는,
“공부를 많이 했으모 장군이 됐을낀데... 우찌 그리 사주와 형편에 딱 맞는 일을 잘 찾았소?”
라며 무릎을 탁! 치더라는 여담도 있다. 사람 두셋만 모여도 심심찮게 풀어내는 단골 이야깃거리다. 물론, 엄마가 교회를 다니기 전 시절 얘기다. 학교 공부를 계속했으면 남자처럼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여러 사람을 돌보고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학생한테 밥상을 차려주고 챙기는 것도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과 비슷하여 내린 점괘이리라. 게다가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을 아들처럼 정성을 쏟을 수 있었으니 딱 맞는 쪽집게다.
엄마는 하숙집을 삼십육 년을 하셨다. 처음에는 두 명에서 시작하여 많을 때는 여섯 명에 저녁밥만 먹는 학생까지 여덟 명을 건사하기도 했다. 엄마 밥이 맛있다고, 사람이 좋다고 찾아오는 학생이 많을 때는 엄마도 신이 났다. 사람 사는 재미와 보람이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무엇을 하든 그 일에 인정받고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하루하루가 족하였다. 더군다나 아들이 없는 엄마는 학생들이 아들처럼 잘 따르고 공부를 잘하니 얼마나 든든하고 보람이 컸을까 싶기도 하다.
어떨 때는 시골에서 바쁜 부모를 대신하여 학교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담임도
“하숙집에서 이렇게까지 하시다니요?”
라며 놀랐다고 한다. 학부모가 있는데도 하숙집 아주머니가 담임과 진로 상담을 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한 아이는 남의 집 자전거를 한번 탔다가 오해를 사서 파출소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 문제도 엄마는 시원시원하게 해결했다. 경찰한테,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이런 사소한 일을 문제 삼으면 안 되지요!!”
라고 말이다. 멀리 집에 있는 학부모한테는 별일 아니라고 안심시키고 학생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변인이 되었다.
학교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구안와사가 생겨서 집으로 달려온 학생도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서둘러 가장 빨리 치료하는 길을 택했다. 고비를 넘기고 곧바로 회복되어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한 적도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대한민국 대학교에서는 오지 말라는 데가 없다며 호탕한 웃음으로 대입 결과를 알리며 합격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엄마도 딸이 있는지라 그 학생들이 그냥 하숙생으로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부 잘하고, 언행이 반듯하고, 장차 한자리하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되는 아이들이 어찌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의 인연은 쉽게, 억지로 맺어지는 게 아니다. 잘 알고, 오래되고, 챙긴다고 맺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혀 모르고, 몇 번 만나지 않아도 혼인으로 맺어지는 지금의 사위를 둔 걸 보면 사람 인연은 누구도 전혀 알 수 없는 묘미가 있다. 엄마 마지막 가는 길도 사위가 정성스레 모셨다.
하숙집에 수많은 학생이 지내다가 가고 결혼 소식을 알려 왔지만 바쁜 일상을 이유로 결혼식 참석은 못했다. 결혼식에는 딱 두 번만 갔다. 정이 많아 꼭 참석해 달라고 여러 번 연락했던 아이와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학생. 둘이었다. 다쳤다는 말을 듣고 그냥 말 인사로만 지나칠 수 없다고 하였다. 직접 축하하고 응원하고 기도한 보람이 있었는지 건강한 모습으로 새 식구를 안고 왔다. 대문간을 들어서는 목소리가 들릴 때 맨발로 달려나가 반가이 맞이하던 엄마 모습이 어제 아침처럼 선명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엄마의 마음 바탕이 그랬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으로 먹이고 챙기던 모습.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공감력이 좋았던 엄마다. 군불 지핀 아랫목 같은 뜨끈한 마음이 긴 세월을 씩씩하게 살아온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