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새집에서 잠이 오더나?
1979년. 그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고향산천을 떠나고 학교를 옮겼는가 하면, 엄마는 사글세방을 급히 구해 전학 온 나를 따라 나왔다. 독립시대 서막이 서서히 열리고 앞날에는 어떤 일이 돌발할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한 채 그해를 맞았다. 구순이 넘으신 증조모가 초봄에 갑자기 돌아가시는가 하면 여름 초입에는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 삶 여정에서 지아비를 잃은 일에 버금가는 큰 지각변동이 생긴 한 해였다.
한여름에는 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어느 인기 절정의 여가수가 ‘멀리, 기적이 우네~’라고 노래하며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찌르는 동작을 해서 그렇다고들 했다. 그 가수는 한동안 티비에 나오지 않았고 연말 시상식에는 그 동작 없이 노래만 불렀다. 댐이 범람하여 작은고모댁에는 세간과 키우던 돼지가 홍수에 떠내려갔다고 모두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다. 시내 저지대 주택가도 홍수에 잠겨 포탄 없는 전쟁터였다. 황톳물을 가득 머금은 보아뱀이 하천을 따라 굼시렁거리다가 온 마을을 삼켜버린 듯한 물난리였다.
가을에는 그 용좌가 영원할 것 같던 대통령이 서거하였다는 뉴스로 나라가 온통 살얼음판이었다. 교육공무원 가족인 큰집 어른들은 아이들 입단속을 시켰다. 밤 열두 시 통행금지가 여전히 삼엄했고 ‘간첩 신고는 113’이라는 벽보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절이었다. 저간의 이런 사건은 모두 열 달 사글셋방살이 동안 태풍처럼 그해 사계절을 훑고 지나갔다.
이듬해 2월 초봄. 초등학교 졸업식 날. 자장면은 먹지 않아도 됐고 꽃다발도 필요하지 않다. 학기중에 전학 와서 뿌리내리기도 힘들었던 그 학교는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 맞다. 남의 옷을 잠깐 빌려 입은 듯이 거북하기만 하던 공간에서 떠나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모두가 똑같이 새로이 출발하는 국면이다. 중학생이 되고 엄마가 온다. 옛 모습은 벗고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 진정 희망찬 졸업이다.
등교는 사글셋방에서 했으나 하교는 전셋집이다. 설레며 내달렸다. 비봉산 산책로를 따라 달리면 그 끝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변두리 마을이다. 다닥다닥 모인 집들이 빼곡하고 쌀가게, 미용실, 동네 구멍가게는 기본이다. 정자나무 아래는 어른들이 모이고 조무래기 아이들은 골목골목 뛰논다. 엄마는 한재서 싣고 온 이삿짐을 부리고 있었다. 작은 트럭에 이불장이랑 장롱이며 항아리와 그릇이 대부분이다.
방 안에서는 제각각 자태를 뽐내던 가구다. 하늘 아래 벌거벗은 채로 트럭에서 마당으로 옮겨질 때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귀목나무로 짠 이불장은 작은아버지가 막내아우 결혼 선물로 맞춘 것이다. 원목 질감이 그대로 살아나는 모습은 나체로 길거리에 나앉은 듯했다. 장롱은 큰아버지가 주신 아버지 결혼 선물이다. 새로 구입하거나 맞추지는 않고 큰어머니 혼수품 중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들어낸 가구에는 삼 형제 우애가 고스란히 담겨 뚜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북풍한설은 지났지만 겨울 끄트머리에서 여전히 찬바람은 윙윙거리며 길가 부스러기를 몰고 다녔다. 전셋집 좁은 꽃밭에는 한두 송이 남은 동백이 간신히 계절을 버텼고, 물오른 연노랑 개나리가 꽃눈을 부풀리고 있었다. ’80년 이른 봄날이었다.
이사한 전셋집은 부부교사였던 당숙이 살던 집이다. 고만고만한 네 칸 방에 연탄 아궁이가 딸린 슬레이트집이었다. 앞집, 옆집, 뒷집 구조가 모두 같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이 방, 부엌, 마당이 똑같은 넓이와 모양으로 칸칸이 들어앉은 집들이 블록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줄줄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교원 가족 신혼집이었다. 김 선생댁, 또 김 선생댁, 차 선생댁... 당숙도 그중에서 한 분이셨다.
홀로 남은 엄마한테 한 줄기 빛처럼 터널 밖으로 이어준 분이 바로 작은집 당숙이셨다. 아재는 엄마한테 그 집에서 하숙집하기를 권유했다. 전세금 이백오십 만원으로 시작했다. 그 돈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논농사 소출로 모은 엄마 전재산이었다. 엄마는 주머니에 현금이 두둑하면 평화로워 보였고 지갑이 얇아지면 불안해했다. 그날 이사 경비와 전세자금 마련으로 또 한 번 그 위기를 맞이하고 예민한 불안이 감돌았다.
아버지 보상금도 할아버지와 반반으로 나누었다. 농지 소출로 일년 내내 집안 살림을 꾸리던 할아버지는 현금이 궁하기도 했지만 홀연히 떠난 막내를 두고두고 볼 만한 것 하나는 필요했으리라. 자식 목숨값을 만져보고 싶다는 말씀으로 며느리와 반반씩 나누어 그 흔적을 문갑 안에 고이 넣어두셨다. 시골에 은행이 없던 시절이라 엄마는 돈이 급하게 필요한 이웃들에게 짧은 기간 빌려주며 이자를 모았다. 그 돈 원금과 이자를 합쳐 세 마지기 논을 매입한 후, 손으로 만지는 돈이 없어지자 돌연 불안증이 생겼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현금이 없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는 당신의 일꾼으로 농사를 지었으니 그것도 반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기에 더욱 그랬다. 알뜰살뜰 차곡차곡 모은 돈이 전세금으로 모두 나가고 나니 엄마한테 또 한 번 불안과 악몽에 시달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전세금은 해마다 오십만 원씩 올랐다. 집 매매시세도 해마다 비례해서 뛰었다. 다섯 해가 지난 후에는 당숙이 집을 팔겠노라 했다. 시세대로 팔백오십만 원에 엄마는 집을 샀다. 또 전 재산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만큼 집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몇 년마다 집을 수리하고 자잘한 보수와 수리는 수시로 이루어졌다.
연탄 아궁이를 온수 보일러로 바꾸는가 하면 몇 년 뒤에는 기름보일러로 교체했다. 온수 보일러는 그 경비를 아끼려고 동네 아주머니랑 두 분이 공사를 직접 했다. 간간이 하는 도배도 이웃 아지매들이랑 같이 해결했다. 풀을 끓여서 바르고, 길고 힘 있는 수수 빗자루로 바르고 밀고 붙이기를 도배장이처럼 척척 했다. 부엌을 메꾸고 방을 늘리는가 하면 옥상을 올리고 방을 하나 더 확장하기도 했다.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마당 공사를 했다가 대문을 바꾸기도 하고...
십여 년 동안 수없이 집을 고치고 매만지기를 반복하다가 딸을 결혼시키기 전에는 집을 새로 지었다. 동네 어느 집 딸이 사귀던 남자 친구가 집에 한 번 들렀다가 두 번 다시 오지 않더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자자했다. 초라한 집 때문에 전문직 사윗감을 놓쳤다면서 너도나도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소문 여파인지, 특별조치법 시행으로 건축비가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던 시기여서인지, 여하튼 그 무렵 동네는 온통 새집 짓기 열풍으로 들끓었다. 덕분에 그때는 새 동네처럼 골목마다 불긋불긋 벽돌집으로 반짝거렸다.
집을 지을 동안에는 도로 건너편 집에 잠깐 옮겨 살았다. 새로 짓는 집은 기존 터에서 지반을 반 층이나 높이고 실내 천장은 아파트만큼 더 높였다. 옥상 난간도 엄마 요구대로 가슴께까지 올려세웠다. 빨간 벽돌을 바르고, 이중창문을 달고, 대문에 인터폰까지 달고 나니 여느 아파트가 부럽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하던 건축비용은 이 층 세입자가 일찍 들면서 전혀 걱정할 바가 없었다. 오히려 건축비용이 전세금으로 오롯이 남았다며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보일러를 돌리고 안방에서 잤다. 장판을 깔기도 전이라 신문지 몇 장을 포개어 깔고 얇은 이불을 덮은 초여름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큰 눈을 똘망똘망, 초롱초롱 껌벅거리고 천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니는 잠이 오더나? 나는 한숨도 못 잤다.”
엄마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면서도 기쁨과 설렘으로 하얗게 들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