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중순. 봄 소풍 날 엄마가 왔다. 9일이었거나 19일이었을 것이다. 진주로 전학 온 지 한 달 남짓할 즈음. 우여곡절 사연 많은 나의 전학에 이어 엄마가 내게로 온 이사다. 그러니까 엄마는 그해 봄, 소풍날에 처음으로 분가했다. 증요한 건 그보다 전학이 먼저였다.
처음엔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미루고 미루던 도시로 전학 가는 거사를 드디어 진행한 것이니 그렇다. 아마도 나의 도시 전학 계획은 초2부터 시작되었을 성싶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고, 아이 하나가 깡충거리고 다니면 어른들 눈요기가 되고, 자라나는 새 생명을 보는 어른들 즐거움을 거둘 수 없기에 해마다 미루다가 진행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토요일 오후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의 배웅으로 빨간 버스에 오를 때까지는 괜찮았다. 시골 버스가 미루나무 신작로를 붕붕거리며 달릴 때 풀풀 날리는 먼지를 따라 내 즐거움과 우쭐거림도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 간간이 놀러 갈 때 큰집은 여행지 숙소였다. 잠시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곳. 또래 사촌들이 있고 도시 아이들 놀이를 같이 즐길 수 있는 곳. 동네 가게에서 온갖 학용품과 과자를 구경하고, 새로운 과자를 가끔 맛보기도 하고 구입하여 오롯이 내 것이 되는 즐거움. 이런 재미가 있는 곳이 도시에 있는 큰집이었다.
웬걸. 전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머물고 머물러야 하는 큰집은 엄마가 없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곳.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영화를 보며 눈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곳이 되었다. 심지어 몽유병까지 생겼으니 큰어머니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은 집으로 가는 날. 수업을 마치고 오후가 되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달린다. 혼자서 못 가니 처음에는 큰 언니가, 다음에는 작은 언니가, 또 동생이 동행하며 엄마가 있는 고향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중에는 혼자서 다니기도 하고.
그러기를 한 달을 넘길 즈음. 진주로 돌아올 때 울며불며 집을 나서는 광경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하나같이 엄마한테 일렀다.
“고마 딸 따라서 진주로 나가라.”
“아아가 울고 다니는 게 안쓰럽지도 않나?”
“눈 뜨고는 못 보것다.”
결국 할머니와 어른들 허락으로 진행된 이사가 그날, 봄소풍날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꽃가지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게 늘어지던 때. 온 세상이 축복하는 날이었다. 동네 똥개마저도 왈왈, 큰집 깜장이마저도 야옹야옹. 온 동네 만물이 축제의 나팔을 불렀다.
큰집 가까이에 급히 마련한 집은 사글세방이었다. 열 달치 방세를 한꺼번에 지불하고 사는 계약 방식이다. 옷장도 없이 이불 한 채, 아빠가 쓰시던 앉은뱅이책상 하나, 부엌엔 식기와 수저만 두 벌. 여름철에 연탄 대신 사용하는 석유 곤로. 모녀가 살 이삿짐은 단출했다.
셋방살이 좁은 부엌에서도 엄마는 매일 무언가를 만들었다. 시골에서는 할아버지 몫이던 황금빛 계란프라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은냄비 흰쌀밥, 참기름과 깨소금을 적당히 넣은 콩나물, 고춧가루와 마늘만 넣어도 입맛을 돋우는 겉절이. 탁탁 타다탁. 두 식구 단출한 밥상이지만 도마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만든 반찬은 늘 옆방, 아랫방까지 갔다.
큰방 할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살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는 큰딸, 하얀 교복 차림으로 두 갈래로 머리를 땋고 여상을 다니는 작은 딸. 아들은 결혼하여 가끔 들르곤 했다. 큰방 할머니한테 엄마 반찬은 늘 반가운 선물이었다. 딸이나 며느리는 반찬을 못한다며 고맙다는 인사도 길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수돗가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그 할머니 임종도 엄마가 했으니 고향을 떠나와도 어른을 살뜰히 챙기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아래채에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살았다. 만삭이 되고 출산할 때까지 새댁은 엄마 반찬을 더없이 반겼다. 바깥일은 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새댁인데도 살림은 늘 서툴러서 엄마는 친정 아우처럼 잘 챙겼다. 심심하면 고성이 오가는 신혼부부에게 친정엄마처럼 가르치고 다독거리기도 하면서.
그 시절 엄마가 새롭게 배운 음식은 과일 샐러드다. 일명, ‘사라다’. 온갖 과일을 썰어서 담고 마요네즈와 섞으면 되는, 간편하면서도 알록달록 색감이 좋은 음식이다. 엄마표 사라다는 사과, 당근, 오이를 깍둑썰기하고, 계란이나 메추리알을 삶아서 넣고, 귤도 두세 번 나누어 넣는다. 계절에 따라 단감을 넣기도 했다. 마지막엔 땅콩, 건포도를 뿌린다. 사라다는 마치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 엄마의 꿈처럼 알록달록했다. 시댁을 떠나 독립의 서막이 펼쳐진 이정표처럼 색감이 선명하기도 했다.
사라다를 한번 하면 얼마나 많이 하던지 큰방, 아랫방, 큰집, 건넛집까지 한 양푼이씩 돌리고도 우리가 먹을 양이 충분했다. 시골에서 제사음식, 잔치 음식을 하던 큰손이 그대로였다. 큰어머니도 사라다를 자주 만드셨지만 엄마표 사라다를 들고 가면 사촌들은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라다 속 건포도를 반겼다. 엄마는 사람들 마음에 활짝 피어나는 음식으로 꽃 지문을 남겼다.
그해 봄에는 엄마가 방직공장에 잠깐 다니다가 평생 고질병으로 발가락 무좀을 얻었고, 여름에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지만, 어린 딸 혼수품을 미리 준비한다면서 새 그릇을 사고, 사라다 같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서 나누며 아픈 세월을 포장하고 견디었다.
우리는 함께하는 고통과 혼자 사는 고독 사이 좁은 길에서 방황하거나 왕래하며 산다. 진주와 한재를 오가며 파종과 수확도 놓치지 않고 시집과 독립이 공존하던 시절. 다채롭던 사라다 같은 마음을 나누던 시간. 좁고 초라한 사글셋방에 살던 그때가 엄마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희망찬 순간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