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쌀쌀했다. 바람은 기승을 부리고 햇살은 숨어들었다.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마파람에 유난히 가슴이 시렸고, 뒷산에서 몰려오는 된바람도 등줄기를 내리쳤다. 서산 끝자락에 앉은 집에는 산그늘도 일찍 찾아들어 눕는다.
추운 겨울이지만 애들은 그저 밖으로 뛰쳐나가기 마련이다. 볕살이 좋은 앞터 어느 집 돌담 옆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너그 집은 여자만 사 대가 살제?”
우리 집 일꾼의 딸이 가까이 다가와 할아버지 잃은 내게 건넨 말이다.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빛깔을 담고 어린 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 말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 한참이 지나도 그 순간의 당혹스럽고 생경한 느낌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충격도 컸기 때문이리라. 두꺼운 얼음장이 깨지고 무게중심을 잃을 만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풀이 죽어서 집으로 들어간 나를 금방 알아본 사람은 엄마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가만히 있을 분은 아니었다. 집 뒤 대울타리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그 아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뒷날 아침까지 묵묵히 기다릴 수 없는 엄마다.
“얼라들 듣는 데 무슨 말을 우찌 했길래 이 집 아아가 우리 아아한테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욧.”
저녁을 준비하다가 산 밑으로 내린 땅거미를 밟고 씩씩거리며 갔던 엄마는 화가 반쯤이나 풀렸는지 무거운 침묵만 안고 돌아왔다. 저녁 내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랑채 일꾼들 빈방에 동네 초등학교 남자 선생님을 모셔오는 것이었다. 그 작업은 이튿날 아침 선생님들 하숙집으로 찾아가 바로 해결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 발령을 받아 온 스물둘의 총각 선생님이다. 회색빛이 만연하던 집이 가을 호수에 내린 윤슬처럼 빛났다. 드디어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이 제각각 색을 되찾았다.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서는 일부터 카세트에서 유행가나 팝송이 흘러나오는 일까지. 젊고 푸른 기운을 가득 채우며 새 세상을 창출했다. 밤에는 동갑내기 사촌 아우와 과외 수업을 받고 부진했던 기초와 선행학습을 했다.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는가 하면 예체능까지 섭렵하여 시골 동네에서 피아노까지 칠 기세였다. 한 해를 그렇게 살았다.
나날이 달라지는 모습을 본 엄마는 미루고 미루었던 도시 전학을 감행하기로 했다. 봄볕이 따사로운 토요일 오전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기 전. 고령의 증조할머니 부고가 학교로 날아들었다. 한 해 전에 큰아들을 잃으시고, 깡충거리며 다니는 어린 증손녀마저 도회지로 간다니 허망하셨을까. 감기 병치레 한번 안 하시던 분이 천국 차표를 쥐고 떠나셨다. 꼬박꼬박 교회를 다니시고 무언의 예배를 드리며 천국행 차표는 각자 하나씩만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던 분이다. 늘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시더니 마지막 날까지 병상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삶을 사셨다.
삼일장을 치른 후 사랑에 모두 모였다. 어슴푸레한 백열등 아래 한동안 고개숙인 침묵만 흘렀다. 누군가의 헛기침으로 조용조용 말소리는 깨어났다. 도란도란 이야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목청이 높아졌다. 놀라서 방문 앞 마루에 앉아서 듣게 되었다. 대부분 엄마를 중심으로 여럿이 목소리가 컸다. 어떤 이는 방바닥을 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침묵을 지키고, 어떤 이는 울분을 토하며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마지막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 안 계신 세상에 우리 모녀가 우찌 될지도 모리고 저리 철없이 뛰어댕긴다....”
라며 한 해 전 할아버지 상중에 타박을 주었던 말씀이 스쳤다. 그때 ‘할아버지 안 계신 세상’을 눈으로, 귀로 생생하게 듣고 보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리고 젊은 엄마는 어떻게 그런 세상 이치를 미리 꿰고 있었을까 싶다. 그 시대에 남편 없고 아들 없는 며느리는 세상에 알몸으로 내던져지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 일찍이 깨치고 있었던 엄마다.
살고 있는 집도 줄 수 없고, 해마다 소득이 생기는 대밭도 안 되고, 모녀가 살 만한 자그마한 삼 칸 집 마련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남은 것은 누렁소 한 마리였다. 눈이 웅숭깊고 사람 말귀를 다 알아듣는 듯한 소가 엄마 몫으로 남은 유산이었다. 그 소마저도 한 해 뒤에는 새끼를 낳고 마른 입에 딩겨를 먹다가 죽고 말았다. 갓 태어난 송아지도 같이 어미소를 따라갔다. 소값으로 육십만 원을 받았다. 그것도 소고기를 판매한 금액에 작은할아버지가 이십만 원을 보태어서 그렇게 보내왔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격앙되었던 밤이 지나고 객지에서 온 분들도 모두 떠났다. 할머니랑 엄마, 나 그리고 선생님만 고요하고 쓸쓸하게 남았다.
“간밤에 아아들끼리 그리 큰 소리가 나도 우째 한 말씀도 안 보태고, 쥐죽은 듯이 조용히 계실 수가 있습니꺼!”
“나는 힘이 없다. 다 쪼그라진 뒷방 늙은이가 무슨 말을 보탤끼고.”
“그래도 어른이라면 한 말씀은 하셔야지요! 사랑으로 내려와 보기라도 해야지요!”
“나는 못한다. 하기 싫다!”
“허 참! 그러고도 제 손에 밥 얻어 잡수실라꼬예? 밥이 넘어갑니까? 밥이!”
“하기 싫으모 안 해도 된다!”
“... 예에. 알겠십니더.”
자녀들끼리 큰소리가 나도 말씀 한마디 보태지 않고 조용히 안방만 지키고 있던 할머니를 엄마는 서운하다 했다. 고부간에 그토록 날카롭고 큰소리가 오가면 관계가 영영 틀어지고 다시는 대면하지 않을 줄 알았다. 어른들 세계는 달랐다. 돌아서서 다시 밥상을 차리고 얼굴을 마주보며 앉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린 딸을 품에 꼬옥 안고는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밤을 넘겼다.
이튿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이 씩씩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 나서는 걸음걸이가 더 힘차고 눈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왈가왈부 따져도 한 치의 변화도 없으리란 걸 일찌감치 알아버린 막내며느리다. 게다가 가족이 아닌 학교 선생님을 의식해서 한층 달리 조심함이다.
며칠 후 토요일 정오쯤. 나는 도회지로 전학 가는 버스를 탔다. 한 주일 늦춰진 역사적인 거사가 진행된 것이다. 그 빨간 버스가 우리 모녀를 미래 어디로 데려갈지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79년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