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섯손가락 Jul 14. 2024

입술과 눈동자 사이에서 물결치는...

∎5일차(16장~19장)


브론스키는 가정생활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사교계를 휩쓸던 눈부신 여성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숱한 로맨스를 일으켰으며, 미망인이 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녀의 연애 사건은 사교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어린 시절을 유년 학교에서 보냈다. (127)


그는 브론스키에게 키티를 향한 레빈이 마음을 말해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아냐, 자네는 내 친구 레빈에 대해 그릇된 평가를 내리고 있어. 사실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사람이고 때로는 남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해. 하지만 때로는 매우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지. 그는 대단히 순수하고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야. 게다가 황금처럼 고귀한 마음을 지녔어. (134)


브론스키는 차장을 뒤따라 객차로 들어가다가 어느 부인에게 길을 내주고자 객차의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교계 사람의 감각이 몸에 밴 브론스키는 그 부인의 용모를 보고는 한눈에 그녀가 상류사회의 여성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객차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번 더 그녀를 꼭 보아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겸손한 기품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누군가를 찾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137~138)


카레니나는 이런 상투적인 말을 진심으로 믿고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는 살짝 몸을 굽혀 자기 얼굴을 백작부인의 입술에 댔다. 그녀는 다시 몸을 펴고 입술과 눈동자 사이에서 물결치는 그 미소를 지으며 브론스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손을 힘차고 대답하게 끌어당기는 그녀의 정열적인 악수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대하기라도 한 듯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걸어 나갔다. 그 걸음은 제법 풍만한 그녀의 몸을 신기할 정도로 가뿐히 옮겼다. (141)


브론스키는 말이 없었다. 그이 잘생긴 얼굴은 심각해 보이긴 하나 너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43)


카레니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그녀가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중략) “불길한 징조예요.” 그녀가 말했다. (중략) 그녀는 마치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쓸데없는 무언가를 육체로부터 몰아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덧붙였다. (145)


반짝이는 눈의 짙은 속눈썹 아래서 갑자기 눈물이 비쳤다. 안나는 올케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활기가 넘쳐흐르는 작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150)


그녀가 이 말을 내뱉은 순간,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151)


안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처지를 포착하고, 마음의 저울로 그것을 달아 본 후 덧붙였다. “아니에요.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있고 말고요. 그래요, 난 용서할 거예요. 난 똑같은 경우를 겪지는 않겠지만, 용서할 거예요. 마치 그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용서하겠어요.”(156~7)   



  

∎<단상>


작가 톨스토이는 안나가 등장하기 전에 미리 브론스키를 악역으로 단정지어 놓고 비난조로 서술한다. 가정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어머니마저 사교계를 휩쓴 여성, 숱한 로맨스를 일으킨 미망인으로 소개한다. 심지어 브론스키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 키티와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유혹하는 일이 얼마나 나쁜 행실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파렴치한으로 몰고 간다. 톨스토이의 시각으로 보면 안나와 그의 불륜은 브론스키의 근본적으로 왜곡되고 무책임한 연애 행각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일찌감치 알려주는 셈이다.


드디어 안나가 열차역에서 브론스키를 만난다. 영화가 시간순으로 전개된다면, 원작 소설은 브론스키가 스치듯 안나를 먼저 만나고, 브론스키의 어머니와 기차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 뒤에 나온다. ‘벌써 우리는 기차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단다’라는 식이다. 그런 순서에서 브론스키는 안나를 알기 전후 어디에서나 풍부한 감성을 느낀다. 객차 입구에서도 단번에 상류사회 여성임을 알아보고 우아함과 기품, 상냥하고 다정한 빛. 절제된 활기, 차분한 생기, 희미한 미소까지 챙긴다. 백작부인이 소개한 후에도 입술과 눈동자 사이에서 물결치는 미소를 보고 특별한 기쁨을 느끼고 사랑스러워한다.


이들이 역에 도착했을 생긴 역 경비원의 사고는 끔찍하게 슬프면서도 불안감을 조성한다. ‘기차가 선로를 바꾸는 소리를 듣지 못해 그만 기차에 치이고 말았다는 사고다. 이런 소식을 듣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안나의 모습을 보고 브론스키는 미망인에게 200루블을 기부한다. 안나는 역 경비원의 사고 소식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입술을 떨고 눈물을 가까스로 참는다. 오빠가 달래는 말에 ‘불길한 징조’라며 답하며 앞으로 전개될 엄청난 사건의 복선으로 넌지시 암시한다. 이 부분에서는 읽는 독자도 불길한 예감으로 같이 위축된다.


안나는 영리하다. 오빠의 외도로 괴로워하는 올케 달리를 설득하기 위해 왔다. 오빠와 이혼하기 말기를 종용하는 설득. 하지만 누구나 아는 그 속내를 단번에 표면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선, 오빠의 잘못을 나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올케의 상처난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한다. 톨스토이는 마치 요즘 인기 있는 상담 기법을 이미 배우고 터득한 것처럼 둘의 대화를 공감하기로 문을 연다. '얼마나 속상하고 아픈지 알아요, 힘든 거 알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등으로 공감하며 시작하다가 올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최선의 무기까지 알아낸다.


그래서 그녀는 영리하다. 용서할 수 있냐, 사랑하느냐를 따로 묻지 않는다. 한꺼번에 엮어서 오빠를 용서할 만큼 사랑하느냐고 질문한다. 그와 동시에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겠다는 정답을 자신의 확신으로 알려준다. 달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깨끗이 용서하는 게 진정한 용서이고 사랑’이라며 기뻐한다. 그러니 안나는 영리한 부부 문제 해결사 시누이다.


또한, '난 똑같은 경우를 겪지 않겠지만, 용서하겠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형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용서하겠다'라는 안나의 대사는 섬뜩하다. 나중에 자신의 불륜을 두고 남편한테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난감한 미래를 아는 독자는 지금 나오는 안나의 목소리는 진정 무엇일지, 톨스토이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곰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운명의 장난? 불운의 씨앗? 한 치 앞을 모르고 달리는 인생사? 본능적 사랑이 이끄는 예측불허의 질주? 작가의 대서사 박음질은 시작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