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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un 12. 2024

끔찍한 악을 응시하는 숨 막히는 시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소리로 재현하는 끔찍한 폭력에 대하여

※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및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6월 5일 국내 개봉하였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알지 못했지만, 개봉 전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독특한 디자인의 포스터였다. 포스터의 한 풍경은 조용하면서도 평화로운 뒷마당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위로 비치는 하늘은 온통 새까만 색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포스터를 보면서 '이 영화가 대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서 관람했던 영화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화면 속에서 잔인한 장면은 단 한순간도 재현되고 있지 않지만, 화면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와 뜻은 이것이 정말 인간이 저지른 일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영화의 엔딩은 24년도에 관람한 영화들 통틀어서 가장 충격적이고 소름 끼치는 엔딩이었다.



사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독일의 한 장교는 자신이 일하는 곳 바로 근처에 마련된 주택에서 5명의 아이들,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에는 꽃이 만발해 있고, 뒷마당에는 미끄럼틀이 달린 수영장이 있으며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직장에서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말 그대로 남부러울 것 없이 호화롭고 안락한 곳처럼 보인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집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옆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회스 작전'으로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창설했던 루돌프 회스라는 인물이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있다가 잠시 전근 갔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 속의 정보들을 두 가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배우들이 하는 대사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서이다. 



영화 속에서는 배우들의 클로즈업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먼발치에서 위치한 카메라는 마치 다큐멘터리의 관찰 카메라처럼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인물들과의 거리감은 영화가 끊임없이 인물들과 거리를 둠으로서 관객들이 단 한순간도 이들에게 몰입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이들이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이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이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거의 딱 한 번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가 있는데, 약간 아래쪽에서 위쪽을 향하게 잡은 루돌프 회스의 얼굴이다. 그의 얼굴 뒤로는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관객들은 그 장면의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화면 속에서 비치고 있는 상황이 다름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형이 집행되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한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악마가 되어버린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연출되는 화면들은 온통 '충돌'로 가득 차 있다. 화면과 소리 간의 충돌, 인물들 간의 충돌 등.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과 소리 간의 충돌이다. 포스터 속의 이미지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마당의 정원들 풍경 바깥으로는 계속해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개 짖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소리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들이 계속 들려오는데,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인물들의 행동 흐름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수용소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회스의 집 마당을 비출 때 항상 화면 밖에서 어떠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는 화면 속 아름다운 풍경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그 소리가 계속해서 '소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뒷마당에 있는 이들에게 그 소리는 전혀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러한 '소리'가 들리는 일상에 잠식해 버린 그들은 뒷마당을 평화롭게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심지어 그 '소리'가 들리는 뒷마당에서 다른 이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까지 한다. 이미 모든 것을 안락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회스 가족들의 삶에서 그 '소음'은 그저 우리가 사는 삶에서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소리'와도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죽음과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수용소 근처의 강가에서 아들, 딸과 함께 소풍을 즐기던 회스는 강물에서 흘러내려온 무언가를 발견하고 황급히 아이들에게 강밖으로 나오라고 말한다. 그가 물속에서 발견한 것은 미처 다 태워지지 못한 사람의 턱뼈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어른들이 목욕을 시켜주는데 아이들의 코에서는 까만 잿물이 흘러나온다. 이들의 삶 한가운데에는 분명 죽음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그 죽음을 무시했으며, 그들은 혹여나 그 죽음이 자신에게 닿을까 봐 진저리를 치는 끔찍한 인간들이었다. 



영화 속에서 모든 인물들이 이렇게 무감각하게만 행동했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사실 덜 했을지도 모른다. 대비되는 인물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는 헤트비히의 어머니와 폴란드 소녀를 보여준다. 헤트비히의 어머니는 딸의 집에 초대받아 며칠을 묶게 된다. 처음 그는 자신의 딸이 번듯한 집을 갖고 부유한 환경에 살게 된 것에 대해 감탄했지만, 자신의 딸 집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창문 밖으로 목격하면서 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집을 나와버린다. 그는 딸에 대한 진실을 그 집에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타인의 피로 세워진 것이었고, 자신의 딸이 무엇을 짓밟고 그 집 위에 올라섰는지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딸의 집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도망쳤다. 헤트비히의 어머니가 최후에 남아있는 인간 양심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면, 폴란드 소녀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마지막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수용소에 붙잡혀 있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사과를 숨겨두는 폴란드 소녀는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그는 오히려 햇빛 아래 있는 독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빛나 보인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집은 온통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햇빛 아래에서 비치는 회스의 마당보다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마당 너머로 들리는 소음 외에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소리가 영화의 엔딩에 이르렀을 때 회스가 토하는 소리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졌다. 독일 장교들이 모인 파티에서조차 2층에서 1층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가스로 몇십 분 만에 죽여버릴 수 있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만큼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한 회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아내와 잠깐 통화를 한 뒤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토를 하기 시작한다. 그가 토하면서 들리는 역한 소리와 영화 곳곳에서 들리는 괴랄한 소리는 서로 비슷하게 들리며 이는 화면 내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사실은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의 이면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장치로서 존재한다. 



영화의 엔딩에 다다랐을 때 갑작스럽게 하얀 점과 같은 것이 화면에 보이고, 관객들은 그 점이 곧 동그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사람들이 어떠한 공간을 청소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공간은 아우슈비츠 소용소의 현재 모습이었다. 직원들이 출근하여 그 공간을 무덤덤한 얼굴로 청소하고 풍경이 이어지고, 뒤이어 공간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곳이 어떤 공간이 다시 한번 환기된다. 그다음 컷에서는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시장 유리창 너머로 가득 쌓여 있는 유대인들의 신발이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독일인들이 벌인 잔인한 일들에 대해서 짐작만 할 수 있었지만, 이 장면에서 수없이 쌓여 있는 죽은 이들의 신발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그들이 행한 악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일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관객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관객들이 화면 밖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 그 어떤 것을 상상했던, 현실은 그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어 버린다. 수없이 쌓여있는 죽은 이들의 신발, 옷, 그들이 사용했던 물품 등 독일인들이 자행한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악'이었는지를 한 번에 드러난다. 이후 현실의 모습이 끝나고 다시 뒤이어 이어진 장면에서 회스는 계단 앞에 서서 어두운 복도 한 군데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는 이내 발걸음을 돌려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이전 장면과 달리 계단은 모두 불이 꺼져 있다. 회스는 자신의 손에 직접적으로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관리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주동자이다. 그는 주요한 인물들이 모인 회의에 어떻게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합리적으로 옮길 수 있는 지를 발표한다. 수용소를 다녀온 그의 신발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대략적으로 예상만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엔딩 직전에 비춰 보이는 현실과 결합하면서 회스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이내 불이 모두 꺼진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가는 장면은 회스가 자신의 발걸음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감정적으로 격해지지 않고 그 어떤 영화보다도 고요한 시선으로 홀로코스트를 조망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일들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득히 먼 곳에서 비춰주는데, 이 영화가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차갑고 냉정하기만 하다. 그 시선을 통해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이 일이 앞으로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일임을 현실과 영화 속 배경을 넘나들며 보여준다. 영화는 아카데미 수상 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했던 말처럼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이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동시에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가 돼서는 안된다고도 말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당시 존재했던 인물들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방관자로 설 것인가? 아니면 영화 속 폴란드 소녀와 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여전히 전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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