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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느림 May 13. 2022

임신은 동화가 아니라 역경이다.

임산부가 되기 전 나의 어쭙잖음에 대한 반성

내 종교는 불교. 매일 저녁 기도를 한다. 기도는 임신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한 때부터 꾸준히 하려고 했다. 임신 16주 차 1일인 오늘까지 꽤나 꾸준히 해온 편인데, 어제 하루는 기도를 건너뛰었었다. 도저히 할 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겨 의도적으로 건너뛰었다.



이번 임신은 큰 이벤트 없이 12주까지 왔다고 생각했다(계류 유산 1번, 화학적 유산 2번 경험). 이제 나도 안정기에 들어섰으니 조금 안심해도 되나 싶은 때부터 피가 비쳤다. 아무 생각 없이 간 화장실에서(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을 눌러 자주도 간다. 새벽에도 간다. 의지대로 참을 수도 없다. 내 육신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걸 느껴보려면 임신 체험 추천) 속옷에 혹은 변기에, 휴지에 생각지도 못한 빨간 피를 본다는 건 임산부인 나에겐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16주 1일이 된 시점까지도 나는 매일 속옷과 휴지에서 갈색 피와 분비물을 보고 있다(이 정도면 화장실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그래도 놀란다. 조금 덜 놀랄 뿐). 그 기간 동안 충격받은 하혈 2번, 절대 안정 취하라고 해서 입원, 피고임이 더 커진다며 대학병원 방문. 아기는 다행히 괜찮다며 숱한 객관적인 정보와 주관적인 경험을 들어도 유산 경험이 있는 나는 그 순간 안심일 뿐 늘 걱정과 불안을 안고 피라면 노이로제에 걸릴 만큼 보며, 대체 언제쯤 멈추나 날이 서 있던 4주를 보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라며 성별 유추하기 바쁜 시기인데 나는 성별이고 나발이고 매일 마음을 다잡고 들어가야 하는 화장실(화장실도 맘 편히 못가)에서 힘주면 아기가 잘못되지 않을까, 피가 또 나오지 않을까, 없던 피가 또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이었다.



그 사이 입덧은 사라져서 컨디션은 회복되어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나면 어김없이 피는 다시 비추고 서있기도 불안, 누워있기도 불안, 내 몸의 배신에 어느 장단을 맞추어야 될지 나조차도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누가 대신 이 경험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매번 이 경험을 감내해야 되는 내가. 내 몸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싫었던 것 같다.


왜 난!
내 몸은 왜 이렇게 생겨먹어 가지고!
큰 이벤트 없이 아기 잘 낳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왜 난 이게 이렇게 어려운 건데?
왜 난 이렇게 힘든 건데?
왜 나여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만큼 날이 서있었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피를 본다는 건 이 모든 경험이 처음인 나는 편안할 수 없는 이벤트였다. 그러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남편에게 전해져 한층 예민해진 나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 마음 하나 몰라주는 것 같고, 좀 더 섬세히 나를 챙겨주지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 난무하는 생각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의사들의 ‘괜찮다. 주수가 차면 유산 확률이 낮다. 움직여도 된다’라는 말에 더 초점을 맞추어서 긍정하는 그의 태도가 이상하게 나를 더 힘겹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나와 매우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피 한번 덜 볼 거라고 미련하게 눕눕 하고 있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남편은 내가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매일 겪는 경험과 마음을 몰라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서운함이 더 커졌다.



피는 그가 매일 화장실에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는 거니까. 임신은 그가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거니까. 그도 그 나름의 노력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노력을 이해할 만큼의 여유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쌓여 임신이 너무 불행하게 느껴졌다. 경단 기간이 더 강하게 다가와 조급한 마음 또한 생기며 지금 이 상황이 한층 더 원망스러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정말 과연 아이를 갖고 싶은 건지에 대한 원론적인 생각부터,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떨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더욱 불안해졌다.



이 아이를 또 한 번 잃게 된다면 나에겐 너무 재앙처럼 다가올 것 같았다. 또다시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이 아기를 너무 사랑하고 애착해서라기 보다 나에게 임신 경험은 기대와 좌절의 반복으로 너무 고되다 보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실 더 큰 것 같다. 



정말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번엔 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주길 바라는 마음이 내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그런 마음도 큰 것 같다. ‘임신을 하면 그냥 아기가 응애 하고 알아서 나오는 줄 알았지’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내 몸뚱이로 새삼 느낀다. 



그래서 더 인정받고 싶었다. 편안하게 내 불안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관심과 케어를 듬뿍 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듬뿍과 무한 케어를 바라는 만큼 내 마음은 피폐해져 가고 예민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집구석에 혼자 처박혀 있으면 잡생각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혼자를 바라는 건 아니거든.



더욱 힘이 드는 건 마음껏 울어재낄 수도 없다는 걸 알고서부터다. 내 몸은 지금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울면 아기에게 엄마의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까란 두려움이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나를 또 한 번 옥죄어 왔다. 대체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울고 싶어도 마음 편히 꺼이꺼이 울 수 없는 지금 내 현 상태가 좌절스러웠다. 좀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럴수록 뱃속의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다. 못난 엄마 같고 엄마의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나를 자책했다. 악순환이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정신이 온전할 수가 있을까? 임신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나도 몰랐지.  



조심해야 될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내 몸을 막 사용할 수도 없는 이 제약이 너무 갑갑하고 숨통이 막혀왔다. 정말 책에서 티브이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임신이라는 것이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너무 동화 속 얘기다. 누구 말 따나 임신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직접 경험’ 해본 것이 아니라면 어쭙잖은 조언도 어쭙잖은 위로도 어쭙잖은 것들은 하지 않아야 된다. 나 조차도 임신을 하기 전에 만난 ‘내담자’ 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정말 무지한 상담을 했다는 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 경험에 함께 머무르기엔 내가 너무 몰랐고 ‘어쭙잖았다’



임산부들의 기복은 그럴만하다. 임신이란 제한된 기묘한 경험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더 쉽게 얘기하고 간단하게 조언한다. 위로랍시고,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 보다 경청과 그 마음 그대로 인정해주는 공감이면 된다. 임신 기간은 공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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