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기분 좋은 식사시간을 가졌다.
이모가 얘기한다.
“얼마 전 아빠 비슷한 사람을 봤어. 어찌나 똑같던지.! 가서 말도 걸을 뻔했다니까! “
오빠와 나는 경청했지만 각자의 태도는 조금 달랐다. 무덤덤과 슬픔이랄까. 아주 많이 좋아졌지만, 가족과 나누는 아버지 얘기에서는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이모는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살아계실 때 연락 좀 할걸.. 너네는 마늘 장아찌 다 먹었니?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거 말이야. 난 아직도 못 먹겠더라. 그냥 남겨두고 있어.”
그 말에 결국 슬픔이 찾아왔다. 음식을 먹다가 눈물이 뚝뚝. 오빠가 이모를 말렸다. “아빠 얘기 이제 그만하자.”
나는 아니라고 했다. 괜찮다고. 아버지의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바깥의 사람들은 부담될 수 있으니 안에 있는 가족들끼리라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오빠는 그 분위기가 불편했나 보다. 슬픔이 올라오는 감정이 싫었던 거다. 동생이었으면 한 대 콕 쥐어박으며 “너도 지금 슬픔을 잘 다스려야 해. 그래야 나중에 힘들지 않을 거야.”라고 말을 하겠지만, 오빠라서 그냥 지켜본다. 내 말이 아직 안 들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슬픔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우리의 감정들 중 하나일 뿐이다. 슬픔을 밀어내려고 하면 더 크게 존재하며 자리를 잡을 것이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열어 놓으면 아주 짧게 스치듯이 흘러가며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슬픔을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슬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자아라는 선물이 반대편에서 등장할 수 있다.
슬픔을 배척하고 일에 치여서, 술과 담배 쾌락으로 덮어 버린다면 이 슬픔은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다른 무언가와 함께 언젠가 폭발해 버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