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h Stock EP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졸업할 때까지 인사 말고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동기들이 꽤 있다. 각자 시간표를 짜고, 각자 다른 시간에 학교에 오가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그런 친구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 친구도 그런 동기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신입생 때부터 원체 말수가 적고 공부만 하던 친구라 시험에 관해 뭐 물어볼 때 빼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필요가 없었던 건가. 무튼 1학년을 마치고 곧장 군대로 향하던 다른 동기들과 달리 나와 이 친구는 한 학기를 더 다니고 군대를 가게 됐다. 그때 학교에 남아있는 남자 동기가 몇 안되다 보니 조금은 친해질 법도 한데, 결국 인사말고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채 각자 군대에 가게 됐다.
2년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그 친구도 군대를 전역하자 모처럼 만에 학교 앞에서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생겼다. 강의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만나기로 한 장소에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게 됐는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그냥 별생각 없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나니 그 친구였다. 역시나 인사를 하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시간이 너무 어색해서 무슨 얘길 하면 좋을까 고민 고민하다 그냥 포기하고 교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듣기로 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듣던 그 노래가 참 좋았다. 그 날의 날씨, 그날의 저녁, 그 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는 노래였다.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아무 말 없이 서있는 나와 그 친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 묘하게 어울리는 그런 노래였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그 노래의 여운에 흠뻑 취해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노래 좋다'.
3년 만에 그 친구가 인사 말고 내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 친구의 한마디에 우리는 서로 말문이 트였고, 다른 친구 놈이 오기 전까지 근 3년 동안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우리는 그 날 서로를 향해 제대로 된 인사를 처음 나누게 됐다.
T. I Feel
2. 난 아직
3. 반
그 날 교내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던 노래는 Peach Stock의 '반'이라는 곡이었다. 그 노래를 처음 듣고 3년이 조금 넘은 어느 날, 그 친구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그 친구 놈이 불쑥 그 노래 말고 다른 노래들도 좋다며 들어보라고 추천해줬고, 그렇게 2주 넘는 시간을 위의 세 곡만 계속해서 들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앨범에서 가장 깊게 빠져든 곡은 역시나 '반'이라는 곡이다. 레코딩의 독특함이 물씬 느껴지는 이 곡은 그 곡 자체가 하나의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 분위기는 야외에서 들었을 때 더욱 배가 된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한 곡이라서 그런지 곡 자체보다 곡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더 공감이 간다.
이 앨범에 대해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보컬 노유리의 목소리다. 목소리에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만인의 이상형과 같은 목소리가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목소리 자체가 팜므파탈이다.
그녀가 참여한 앨범들의 평을 보다 보면 Corinne Bailey Rae에 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난 노유리의 목소리가 더 좋다. Corinne Bailey Rae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발랄함이 사라져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빠져든다. 진짜 좋다.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세 곡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좋다. 심지어 이 앨범 말고는 Peach Stock의 다른 앨범이 없어서 더 안타깝다. 그렇다고 Peach Stock의 새 앨범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참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유리의 목소리는 Kitsch Record의 앨범을 통해 더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Kitsch Record의 노래들도 너무 좋다. 이쯤 되면 그녀의 노래가 좋은지 그녀의 목소리가 좋은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그래도 Peach Stock을 통해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아마 Peach Stock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노래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앨범명처럼. As 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