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작은 이야기>
바람에 실려온 기억
기찻길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낡은 기와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찻길을 따라 시야가 끊기는 시선까지 라일락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곳이다. 감성이라는 것, 생각이라는 것, 느낌이라는 것도 여물지 못했던 그때에도 그 길을 걷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의 기분이었다기보다, 꽃의 기분이었다. 꽃이 나의 기분이었다.
방범창이 되었었던 유리창에서도 라일락 길은 곧잘 보였다. 창가에 쪼그리고 몸을 반쯤 걸치고 있으면 멀리서부터 흘러오는 강물처럼 유유히 꽃향기가 액체처럼 흘러서 코끝까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올 때면 싱긋한 향기가 되어 마음을 자극했다. 휘익~하는 센 바람이 불 때면 원래의 향기보다 곱절은 무거운 처음 맡아본 향기가 날 때도 있었다. 자욱이 안개가 끼어 있는 날에는 막에 씐 듯 아득한 향기가 났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수수 떨어진 꽃잎들로 바닥에서부터 차분한 향기가 났다.
어떤 향기는 후각적으로 느껴지는 냄새가 아니라 동사와 형용사로 적절히 섞어 말하고 싶지만 흐리게 펼치지는 영상처럼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뒤늦게 알게 되는 소중한 것들과 그때 느끼고 있었던 시선들이 재회하듯 마주하게 된다. 오래전 그곳에서 아주아주 사소한 것들이 삶의 전부, 세상의 전부일 거라 믿어 절망했던 많은 순간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불안했던 많은 것들 앞에서 이제는 세상의 전부이고 삶의 전부였던 그런 일들이 까마득히 지워지고, 정말로 삶의 전부를 살고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쨌거나 살아가고는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지금의 우리.
지워지는 것들이,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하는 것들이 슬퍼서 기억하기 위해 기억해내기 위해 기억하려고 애썼다. 다시 오래된 풍경 속으로 인도한 건 조금은 더운 어느 봄날, 살랑 부는 봄바람에 실려온 라일락향이었다. 문득문득 실려온 향기가 지금의 꽃향기 었나 오래된 풍경 안의 그 향기 었나. 바람이 부는 모든 곳에, 추억을 공유한 모두에게 실은 각각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아직 돌아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봄바람에 실린 라일락향이 아직 그곳까진 가지 못했을 거라고. 바람을 타고 펼쳐진 희미한 그 길을 다시 혼자 걷는다. 이제야 그 장소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시작한다. 간직했던 것을 세상에 꺼내며 이제야 제대로 기억을 할 수 있겠다고 안심한다.
고마웠다고. 작은 세상이 내가 사는 인생 전부인 줄 알았던 그늘진 길에 꽃향기로 감싸줘서. 혼자 걸어야만 했던 어린 날에 한결같이 라일락향으로 가득한 기분을 만들어줘서. 당신의 꽃말 '젊은 날의 추억'처럼, 나의 어린 날들은 정말로 라일락이었다고. 덕분에 지금도 나는 라일락 같은 기분이라고. 라일락향기가 배어있는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