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2 즈음의 질문들
1. 나의 속도를 지키면서 살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나만 몰랐던 당연한 일인가? 이것마저도 좌절스럽네..) 가속도, 감속도 온전히 내 의지대로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속도계가 고장 나니 요즘은 방향마저 의심하게 된다. 내 삶의 anchor가 이렇게 부실했다는 것이 좌절스러운 요즘.
2. 주말을 끼고 며칠 동안 물리적 거리감을 가졌다. 서울과 서울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내 속도에 집중하고 싶어서 애를 썼다. 작지만 안전한 나의 세계에서 찰나의 평화를 맛보았다. 서울, 일상 복귀와 동시에 무섭도록 말짱 도루묵.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리적 거리감이 어떤 객관적 감각을 남겼다. 더 멀리, 더 오래 떠나지 못해도 이 '감각의 재현’*을 위해 애써봐야지.
* <유리가면>에서 연극의 기초 훈련도 받지 않은 마야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잘할 수 있는 비법.
* 미우치 스즈에 작가의 인생 역작 <유리가면>이 리디북스에 전자책으로 올라왔다. 중학교 때 처음 본 이후 이미 열 번도 넘게 본 작품이고, 일부는 엄마집에도 있어서 굳이 전자책으로 뭘 또사 싶었지만 또 샀다. 전 권 다 샀다. 49권을 이틀 만에 독파. '일의 본질적 재미'가 운명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3.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그래도 꺼내 솔직하게 나 나름의 문장으로 써보자. 아무튼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자꾸 땅을 파고 들어가는 마음을 어떻게든 끌어올려보려고, 건강한 에너지가 필요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뛰고 싶다, 쓰고 싶다. 내 몸을 '움직이고 싶게'하는 욕구가 생긴다. 손현 에디터의 '치유를 위한 쓰기'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 메모해두었다.
4. 답이 없는 질문, 의견을 묻는 질문일지라도 질문한 것에 대해 정확히 답하는 것, 답을 받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의도를 파악하는 영민함과 기어코 응답하는 성실함 둘 다 필요한 일이다. 더불어 커뮤니케이션과 일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답변도 잘하고 싶고, 쉽게 답변할 수 있도록 질문도 잘하고 싶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엉뚱한 대답을 하기 전에 차라리 의도를 다시 확인하자.
5. 내가 가장 강렬하게 감탄했던 기획들은 결국 어떤 장르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장르가 된 것들이다. 장르에 속하면 쉽게 시장/독자/팬/고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유혹을 이기기 쉽지 않고 나쁘거나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장르로 ‘데뷔'하면 빠르게 인지되지만 그 장르가 곧 한계일 수도 있다. ‘장르’를 레퍼런스로 삼지 않아야 극복 가능한 일.(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6. 배우고 싶었던, 작업물이나 태도에 감탄하며 존경하던 선배들에게 일에 대해 질문하다 보면 굉장히 사소한 일의 요소에 푹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무장해제된 표정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피식, 긴장이 풀리고 함께 웃게 된다. 일의 방식과 작업물, 그리고 팀을 아무리 멋지게 포장하려 애를 쓰고 힘을 주어도(=가오를 잡아도), 그 모든 것을 버티고 있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 아닐까. 결국 내 일의 본질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지, 그 자체로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가 일을 지속하는 것의 핵심인 것 같다.
이번 주 나를 살린 콘텐츠 <여름방학>
나영석 사단의 새 예능. 건강, 건강한 생활, 건강한 관계, 건강한 태도, 건강한 생각에 대한 나영석 사단의 고민이 힘주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져서 너무 줗다.
처음엔 삼시세끼, 숲 속의 작은 집 섞어놨나, 자기 복제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정유미, 최우식, 박서준의 케미가 훌륭하다. 효리네민박에선 아이유, 윤아의 재발견이 있었다면 여름방학은 최우식의 재발견이다. 공동생활과 개인생활, 휴식과 일의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발생하는 재미를 깨알같이 잘 캐치해내는 것이 매력. 요즘 이 정도로 웃긴 자막 쓰면서 잔잔하게 시골물 만들 수 있는 제작진이 또 있을까 싶다. 2018년 이후로 거의 요리를 안 하고 있는 나를 다시 부엌에 서게 하는 것은 오직 나영석뿐. 믿보나.
tvN <여름방학>, 2020
* 2018년 1월부터 페이스북에 간헐적으로 올렸던 #위클리진영을 브런치에도 기록해보려고 한다. 이전에 썼던 #위클리진영 들도 틈나는대로 옮겨둘 예정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비해 사진도 양껏, 글도 양껏 쓸 수 있어서 좋다. 대신 시간도 양껏 걸리네.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