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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인문학 강연을 준비하는 마음

며칠 전 생방송 뉴스를 보다가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당시는 연이은 폭우가 이어지는 장마철. 빗소식을 전하는 리포터는 현장감을 살리려고 했는지 오롯이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었다. 머리가 다 젖겠는데, 걱정이 되려던 찰나. 갑자기 리포터 머리 위로 우산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하고 살펴보니 우산 옆으로 한 중년 남성이 서있었다. 길 가던 남성이 리포터에게 우산을 씌어준 것이다. 남성은 최대한 몸을 옆으로 틀어 리포터에게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생방송에 방해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포터도 다가온 남성을 눈치챘는지 빗소식을 전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덩달아 뉴스를 보는 내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당시 뉴스의 한 장면>


길 가던 남성이 내어준 우산 하나. 이 무심한 우산 하나가 소설 한 편을 떠올리게 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어느 토요일 앤은 빵집에 가서 아들 스코티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러나 아들은 케이크를 먹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을까 봐 두려움에 떠는 부부에게 어느 날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케이크 왜 안 가져가는 거요?" 병원에서 아들을 지키던 앤이 한밤중에 집에 들렀을 때 전화는 다시 걸려온다. "스코티 일은 잊어버리셨소?" 스코티가 죽은 날에도 의문의 전화는 어김없이 걸려왔다. 앤은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빵집 주인의 전화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인다. 아들이 죽었는데 생일 케이크라니, 그걸 찾아가지 않았다고 전화를 걸어대다니. 분노에 찬 부부는 한밤중에 빵집을 찾아간다.


아들을 잃은 사연을 알게 된 빵집주인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그는 부부에게 말한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얼까를 생각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한 덩이의 따뜻한 빵과 하나의 우산. 어쩌면 이런 작고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숨고를 틈을 얻는지 모른다. 따뜻한 롤빵으로 허기를 달랜 부부가 잠시나마 고통의 늪에서 숨을 쉴 수 있었듯이, 홀로 비를 맞던 리포터가 잠시나마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듯이.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갓 구운 빵을, 작은 우산을 건네는 마음으로 인문학 강연을 준비다. 내가 아무리 정성껏 준비한다 해서 강연으로 누군가의 인생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연 몇 번 듣는 걸로 변화될 만큼 우리네 삶은 만만치 않으니까. 그러니 내가 준비하는 강연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저 편으로 묻힐 테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것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작은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차마 버리진 못하겠다. 더러 강연을 듣고 잠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댓글을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갓 구운 빵의 온기가 전해질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이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나는 오늘 인문학 강연을 준비한다. 수 백장의 자료와 수십 권의 책을 뒤져 강연에서 전할 메시지를 찾고, 연사를 섭외하고, 삶에 지친 대중들을 불러 모은다.

자, 따끈따끈한 빵이 나왔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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