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만히 당신이 보낸 카톡을 자기 전에 읽어봐.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컴컴한 방에서 핸드폰 화질을 가장 낮추고, 편안하게 보기 모드로. 연애 때 수없이 주고받았던 시적이고 다정한 말 대신 참으로 일상적인 정보들의 나열을.
지난 열흘 간 당신이 나에게 보낸 카톡이나 디엠은 다음과 같아.
- 통장에 돈이 없네요 먼저 있는 돈이라도 다입금할게요.
-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면 그게 내 기록이 되고 내일이 되는 거 같아요마냥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는데 좋은 책을 만나 다시금 열정을 살려보네요.
- 싱가포르 통항 중이네요 선장 되고 첫 통항이네요 신고식 제대로하고 있네요^^ 신경을 써서 그런지 혓바늘 도나고 그렇네요. 잘 자요♡
지난 2년간 코로나로 방선도 안 되고 나는 일과 육아에 지치고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었던 나날을 떠올려봐. 그래, 당신이 어떻게 지내든 나보다야 편하겠지, 챙겨야 할 아들 둘이 달려있지 않으니 일만 하면 되겠지. 나는 그 마음 때문에 자주 분노가 일었어. 세상에서 나만 힘들고 외롭고 지친 것 같은 마음 때문에.
나는 사실 그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고 있어서 좀 화가 나있었던 것 같고, 내 삶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벽이 매번 느껴져 답답했던 것 같아. 그래, 그때 나는 나 스스로에게 화나 있었어. 변명이나 하며나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화를 냈어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했으면서 그 화살을 당신에게 돌렸지. 나에게 글 쓸 시간과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이번에 아이들을 데리고 당신을 만나러 배에 올랐을 때, 드디어 수습 선장에서 선장이 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
"이제 겨우, 드디어 선장이 되었구나. 홀가분한 마음은 잠시고 엄청난 부담 때문에 긴장되지. 내가 이 배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되는지 매일 생각해.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그동안 실력을 쌓았는지 자꾸 되돌아보게 돼. 막상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자리에 앉으니 그 부담감 때문에 잠이 안 올 지경이야."
"처음이니까, 더 그렇겠지."
"맞아. 이번 항차 무사히 다녀오면 자신감이 붙을 것 같아. 다들 처음은 이렇게 시작했을 테니까. 사실 승진이 자꾸 미뤄질 때는 내가 다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올라오니까 위축되기도 해. 그렇지만 그동안 열심히 해왔고 이 자리에서 부단히 배우고 나아가야 도선사라는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 매일 새롭게 배워나가야지."
당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얘기도 했어.
"직전 선장님에게 정말 좋은 것을 많이 배웠어. 사람들을 격려하는 법, 타성에 젖지 않는 법, 선장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 같은 것들. 이 분 만나려고 내가 승진이 좀 늦어졌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당신의 담담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맞아, 살면서 가장 좋지 않은 패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기회와 배움의 얼굴로 다가올 때가 있어. 당신은 그 고비에서 잘 배웠구나, 내심 자랑스러웠어.
나도 사실 당신과 비슷한 부담감을 가지고 지내서 요 몇 달간 마음이 꽤나 무거웠어. 작가가 되면 무작정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왕관의 무게를 느껴봤다고 해야 할까.
책을 쓰지 않았으면 없었을 감정의 롤러코스터. 기사와 보도자료, 다정한 리뷰에 하늘을 날다가도 생각과 삶이 다른 사람이 뱉은 악의 어린 말들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어. 내 주위에 특히나 우호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런 생각과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 좀 위축되었던 날들이었어. 내가 잘하고 싶은 일에서 이것밖에 안 되냐는 말을 들을까봐.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오면서 생각해보니 그런 나쁜 말을 뱉는 사람은 한 두 명이었어. 그런데도 나는 그 말에 묶여서 휘둘렸지 뭐야. 나는 작가가 꿈이라고 해놓고 그저 좋은 말과 인정을 받으려고 애썼던 학창 시절의 모습 그대로로 임했어. 긴장하고 안간힘 쓰며.
잠든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해 집으로 오며 이런 생각을 했지. 싫은 것도, 힘든 것도 이기고 다시 해낼 만큼 나는, 우리는 이 일을 좋아해.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잘 해내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해.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 당신은 선장으로.
그래, 우리는 크든 작든 각자가 가진 삶의 무게와 꿈의 무게를 견디고 있어. 견디면서 나는 또 아무도 읽지 않을지도 모를 글을 틈틈이 쓰지. 당신은 너른 바다를 항해하며 시시각각 크고 작은 판단을 하고 있겠지.
어쩌면 살면서 잘 해내고 싶은 것을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 아닐까.
나는 글을 하나 쓰고 다시 컴컴한 방 안에서 당신이 바다 한가운데서 인터넷 연결이 되는 틈을 노려 보낸 문자를 읽어.
시 같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은 글자들에게서 나는 기어이 당신의 최선을 읽어내. 그리하여 당신의 마음과 노력을 마음으로 느끼고 응원해.
- 잘 통항했어요 선장으로서 업무도 서서히 적응되어가요 신경 썼나 봐요 나도 모르게.
-인터넷이 너무 안돼서ㅠ 이제부터 될듯해요
본선에 맹장 환자 의심돼서 조금 긴장되네.
- 11월에는 방선 안왔으면 좋겠어요 나도 선장 되고 첫 수검이라 신경을 못쓸 거 같아요. 계속 마음 쓰이고 그래서 11월은 그냥 방선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 우리가 꿈을 이루든, 바라는 목표치에 가까이 못 가보든우리는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오늘의 노력을 한 사람은 어제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줄 글을 쓴 나와 자신의 판단에 신중을 기한 당신에게 다정한 박수를 쳐줄 거야. 서로의 꿈을 응원하자. 나는 당신의 응원을 받아 용기 내서 또 도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