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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Sep 10. 2023

당신 없이 결혼기념일


나는 당신에게 덫을 놓았지.

덫인 줄 모르게.

허울 좋은 덕목들로, 당신을 편하게 대해주고 존중하면서, 결코 다른 곳에서 만족을 모르게.


오로지 내 안에서 충만하게.

느슨한 관계라 느껴지면서도

실로 옭매여져 있게.


나는 웃었지.

넌 이제 덫인 줄 모르고 덫에 걸려든 거야.

어쩌면

나란 덫인 줄 평생 모를지도.


14년이 지나서 정신 차려보니

내가 덫에 덜컥 걸려있었더군.

언제부터 걸린 줄도 모르고.


서로 덫이 덫인 줄 모르고.

그게 우리의 결혼생활.


결기 축하해.

나의 특별한 덫에 걸린 것도 축하해.




우리가 결혼한 날을 기념할 필요가 있을까?

순조로운 결혼 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혼이 흔한 시대에 우리가 아직 결혼 생활을 해내고 있다는 것?교과서처럼 나날이 성숙해지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런 기념일이 무용하다고 생각해서, 특히 당신도 없는데  혼자 기념일을 굳이 챙겨봤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냥 그랬어. 이제껏 당신이 선물을 보내오면 좋았고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가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좀 서운했고, sns에 거하게 기념일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면 못내 부럽긴 했어. 아 이런 날 그들은 함께구나 싶어서. 소소하든 거하든 함께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밥을 먹고 하겠구나 싶어서.

요 근래 너무 바빠서 날짜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고 있어.

그러다 며칠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기념일을 챙겨보자, 내 마음을 표현해 보자 다짐했지.

왜 그랬을까.


너무나 익숙해져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유난이라 생각했었는데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상대가 알지 못하더라고.

삶을 풍요롭고 진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성숙하게 표현해서 상대에게 전달하더라고.


그래서 북천교 둑방을 걸으며 생각했지. 당신에게  일 년에 한 번은 내 마음을 전하자.

시의 방식으로. 


나는 걸으며 우리의 만남부터 아름답지 못했을 일들도, 그러나 지났기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일들을 떠올려봤어.  새삼 놀랐지. 어떤 일들은 주기적으로 꺼내 떠올리지 않으면 의미를 잃고 흩어지고 말더라. 흩어진 기억은 나중에 의미도 퇴색되고 말아. 이미 많은 기억이 흩어져  불확실한 감각으로만 남아 있더라. 그래서 부러 꺼내 이야기하고 복기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지 않도록 북돋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이 참 좋은 말이지만 너무 평범하잖아. 나는 좀 쑥스러워.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말 앞에서 발가벗겨지고 동시에 뭉뚱그려져 보편화된다는 게.


나의 방식으로 당신의 의미를 주고 싶었어.

그럴 땐 비유가 적절하지.

걸으며 고르고 고른 비유가 시가 되고

그것이 나의 선물이야.

당신은 바다 한가운데서 나를 생각했을까.

우리의 만남이 생명을 만들고, 키우고 책임지는 삶으로 연결되게 했다는 사실에 작은 감탄을 내뱉었을까.

나의 시를 받은 당신은 어떤 화답을 할까.

당신 마음에서 고르고 고른 단어는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함께 살까,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울었어.

항해 나가기 전, 내가 이런저런 어리광을 부리며 당신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는데

당신이 나의 이마를 거친 손으로 훑으며 한 말이 떠올라서.


"어이구, 안 되겠다.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어라.

내가 당신 아프면 다 보살펴주고 당신 편안하게 보내주고 뒷정리 다 해놓고 따라갈게."


 나는 세월이 흘러 우리가 늙어 몸도 마음도 근력이 다 빠졌을 때 당신 아프면 요양원 보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던진 말이 허투루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 눈물이 났었지. 방심하고 있어서 더 감동했어.


나는...  당신 아프면 요양원 보낼 거니까,

당신은 부디 아프지 말아.  제발... 아프거나 다치지 말고 있는 힘껏 내 옆에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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