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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May 31. 2022

코 잘 푸는 유전자

달리다 잘 넘어져도 유전이래

반바지 원복을 처음 입은 날, 아직 하원하지 않은 아이의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둘째가 바깥놀이를 하며 뛰다가 넘어졌다는 소식이다. 밖에서 놀 때 더 잘 보겠다고 하시면서 상처가 좀 나서 소독하고 밴드 붙였는데 하원했을 때 무릎을 봐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까진 무릎으로 온 둘째는 다음 날 긴바지를 권하는 내게 오늘은 바깥놀이를 안 할 거라 괜찮다면서 끝내 반바지를 입고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선생님께 온 두 통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한 나는 콜백을 하기도 전에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오는 유치원의 부재중 전화는 보통 한 통일 터, 이 녀석이 또 다친 것 같다.


"OO이가 넘어져서 양쪽 무릎이랑 손가락을 많이 다쳤어요."


안전하게 놀도록 아이들과 안전교육을 다시금 했다는 말씀을 덧붙이시는데, 어차피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한둘도 아닌 아이들이 모두 안 넘어지게 보실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굳이 많이 다쳤다고 표현하신다면 정말 꽤 다쳤겠다 싶어 떨리는 맘으로 셔틀을 기다렸다. 아침에 아이의 의견을 수렴해 반바지를 입히면서도 이게 맞나 고민한 어미의 이상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반바지를 손으로 걷어들고 셔틀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의 무릎에는 밴드를 여러 개 이어 붙인 부분과 밴드 없이 드러난 상처까지 아주 난리였다.


"아이고!"


평소에도 신나면 후다닥 뛰다가 꼭 철퍼덕 엎어지는 둘째는 평소에도 사고가 잦다. 떼를 써도 누울 자리 확인하고 드러눕던 첫째를 키우다 만난 둘째는 늘 낯선 장면을 보여주었다. 놀다가 찢어진 머리도 꿰맨 적이 있고 불과 2주 전에는 친구와 뛰다 얼굴을 부딪히고 왔다. 이번엔 무릎을 이틀째 다치고 온 녀석의 모습을 남편에게 전하고 대체 얘는 왜 이렇게 넘어지는 거냐 탄식하자 돌아온 대답은 이러하다.


"나 닮았네. 내가 어릴 때 신나면 막 뛰다 그렇게 넘어졌어."

"그게 유전이 돼? 정말 그런 걸 닮는 거야?"


마침 감기 앓이 중인 친구의 둘째 아이는 코를 흥하고 잘 푼다. 두 돌도 안 된 녀석이 흥하고 코를 푸는 모습에 내 입에서는 절로 우와 소리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은 코를 잘 못 푼다. 내가 휴지를 들고 흥을 백번 외쳐도 녀석들의 약한 콧바람에 코 풀기는 실패를 거듭하곤 했다. 흥 소리가 목에서 나니 코에서 뭐가 나올 리가 없다. 결국 콧물 흡입기를 들여놓고 수시로 애용하게 된 이유다. 첫째는 흥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도 직접 코를 푸는 건 질색한다. 이거 정말 코를 잘 못 푸는 것도 나 닮아서 그런가 싶으니 진짜 유전자엔 별의별 비밀이 다 숨어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어릴 때 잘 못 풀었던 코를 풀게 하겠다고 그렇게 흥을 외친 스스로가 민망하기도 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도 어릴 때 그랬지 않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닮은 구석을 찾게 마련이다. 우리 애가 나를 닮았다는 말을 누가 툭 던지면 정말 내가 지구에 날 닮은 생명체를 낳았나 싶어 감격하기도 한다. 날 닮은 생명체라는 사실은 출산 초반에 닥치는 고된 육아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커갈수록 안 닮았으면 싶은 내 모습이 돋보기를 댄 듯이 크고 선명한 순간이 늘어난다. 유전자가 이렇게 무섭다고? 아니면, 내가 지금 저런 모습인가? 매일이 어렵고 내일이 걱정이다. 이렇게 걱정 많은 나도 닮은 우리 아이가 아니던가.


무릎은 연고와 거즈를 크게 붙여 드레싱을 마쳤는데 손가락은 밴드에 아직 피가 묻어난다. 제법 깊게 파인 상처의 애매한 위치에 어떻게 붙여야 덜 떨어질까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아이는 쉴 새 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다.


"엄마, 내가 머리랑 얼굴은 안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넘어질 때 이렇게 딱 손으로 짚어서 손가락이 이렇게 됐거든요. 물론 뛰지 말걸 그랬어요. 근데 어차피 이렇게 넘어질 줄은 몰랐지만요."


아, 애가 참 말이 많고 긍정적이야. 이후에도 둘째는 넘어지는 상황을 재연하며 자기가 손으로 바닥을 짚어 더 많이 다칠 일을 막았다고 자랑스레 덧붙이며 혼자 어쩔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게 바닥 짚다가 팔 부러지는 애들도 있다는 얘기를 하며 잔소리를 쏟아내고 싶지만, 본인이 저렇게 잘 아는데 뭐 더 할 말이 없다. 우리 부부는 참으로 수다쟁이인데  그 사이에서 나온 얘네가 말수가 적을 리 없다.


올해 들어 부쩍 자란 듯 느껴지는 이 아이들이 나와 남편의 뭘 또 닮았을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그래 봤자 귀여움의 끝물 즈음을 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둥근 모습도 네모난 모습도 세모난 모습도 우리 부부가 꼭 품어야 할 몫이다.


"할아버지, 스마트폰 너무 많이 보시는 거 아니에요?"

"..........!?"


"엄마, 깜깜한 데서 폰 보면 눈 나빠져요. 빨리 꺼요."

"..........."


엄마랑 아빠가 스스로 영 별로라고 생각하는 모습도 너희가 닮겠지만 그 와중에 이런 잔소리만 빨리 배우지는 말고 적당히 좋은 점 위주로 닮아주면 참 고맙겠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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