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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유전

닮으면 닮은 대로 안 닮으면 안 닮은 대로

by 미미

일본제 채칼은 아주 잘 든다. 양배추 썰기에 꼭 필요한 도구지만, 최근에는 내 손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다행히 비호와 같은 몸짓으로 손을 뗀 덕에 살점이 떨어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혈에 시간이 걸렸고 병원에 가보긴 해야겠다는 판단이 서서 정형외과를 찾았다. 다행이라는 소견과 함께 파상풍 주사 맞고 가라는 처방이 떨어졌다. 손가락 끝이다 보니 난도가 높아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직접 드레싱에 나섰다.


"양배추였나요?"

"아뇨. 오이요."


사고원인까지 고백하고 드레싱을 마무리한 후 파상풍 예방주사를 맞고 병원을 나섰다. 꽤 깊은 상처라 한 일주일은 손을 쓸 때마다 욱신거렸다. 나 스스로의 덤벙거림에 이마를 짚는 날이었다. 엄마는 채칼 당장 버리라고 하셨고, 내가 안 버릴 것 같았는지 올 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치밀함에 무릎을 탁 칩니다.


우리 둘째 복복이는 자잘하게 다치는 편이다. 주로 놀다가 발생하는 부상인데 두피가 1cm 찢어져서 꿰맨 적도 있으니 마냥 가볍다고 여기기도 그렇다. 여기서 대체 어떻게 다치지 싶은 상황에서 무릎을 찍혀 다치기도 하고 테이블 밑에 들어가면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다. 아무래도 복복이에겐 '복복이의 완벽한 비서'가 필요한 게 틀림없다. 아기 때부터 떼를 쓸 때도 누울 자리 보지 않고 누워버리던 녀석이다. 떼를 써도 아프지 않게 누울 곳부터 살피고 눕던 안전제일 동동이랑은 아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엄마, 괜찮으세요?"

"어.."

"아무래도 제가 잘 다치는 건 유전인 것 같은데요."

"!!"


요즘 어릴 적 하던 악기를 재개해 보겠다는 의지로 친정 집에서 악기를 가져왔는데, 케이스 여닫다가 손가락 끝이 찡기고 말았다. 시커멓게 피가 고였다. 꽤 오래갈 모양이다. 그 부위가 까맣다 보니 손가락에 벌레가 붙은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는 중에 복복이에게 뼈를 맞았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아니야. 조심성이 많은 편이라고."

"그럼, 저는 엄마 아빠의 유전자가 만나서 새로운 유전자가..."

"....."


이제 그만 놀리라는 눈빛을 보내자 복복이는 빙긋 웃고 쫑쫑거리며 방으로 사라졌다. 눈밭에 대자로 넘어진 일이나, 축구공 차다가 무릎 갈렸던 일이 스쳤지만 입을 꾹 다물어 본다. 그런데 다음 날 또 다른 부상이 생겼다. 선반에서 그릇이 떨어지면서 튄 파편에 손목이 긁혔다. 급히 치우느라 몰랐다가 발견했을 땐 이미 피가 굳어있었다. 한숨을 쉬며 소독을 하고 있는데 애들이 와서 묻는다.


"엄마, 괜찮으세요?"


유전이 아니라는 입장을 마냥 고수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지만, 아이들은 이번엔 유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화가 날 때 가장 멈칫하는 순간은 아이들 속에 내 모습을 볼 때이다. 첫째인 동동이를 혼낼 때 떠오르는 장녀인 나, 눈물이 많은 둘째를 혼낼 때 보이는 눈물 많은 나. 세월이 묻고 사회화를 거쳐 만들어진 지금의 나 말고 내면의 나는 여전한 부분이 많다. 아이들의 약점을 지적하고 혼내고 가르칠 때면, 내 부족함과 연약함이 더 여실히 느껴져 마음이 아리다.


아이가 뭔가 잘하고 못하는 것에 있어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그 연구결과가 절대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타고남과 부모의 영향이 크다는 게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이런 개별적 인간들을 책임지다니 하고 겁이 덜컥 나는 순간도 너무나 많다. 이제 본격 고학년에 들어선 동동이와 본격 학습기에 들어선 복복이를 보고 있자면, 뭐든 나부터 제대로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무겁다.


어쨌든 유전자는 그렇게 무겁게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서, 동동이와 남편의 손가락은 둘 다 떡볶이처럼 도톰한 재주 많은 손이고, 나와 복복이의 손가락은 길고 예쁘게 뻗은 손이다. 동동이의 발가락은 내 발가락처럼 동그랗고 복복이의 어떤 표정은 남편의 어릴 적 사진 하나를 꼭 닮았다. 걱정 많은 동동이를 보면 내 어린 시절 같고, 눈물 많은 복복이를 보면 영유아기엔 꽤 울었다는 남편의 심화버전 같다.


로맨스 드라마인 데다 설렘 유도 장면이 많지만,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내가 끄덕인 부분은 따로 있다.


지윤: 나 안 닮은 모습 보면 서운하고 그런가?

은호: 아니요.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요. 전부 다 나만 닮았다고 하면 좀 무거웠을 것 같아.

뭐만 잘못하면 나 내 책임 같기도 하고.

지윤: 근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별이가 은호 씨보다 훨씬 똘똘해요. 아휴, 엄마아빠들은 괜한 걱정이 좀 많은 것 같아요.


괜한 걱정이라는 말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보았다. 닮고 안 닮고를 내가 정하나. 내게 주신 그대로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역할은 주어진 바가 없을 것이다. 살아볼수록 장점이기만 한 장점은 없고 단점이기만 한 단점은 없다. 최대 장점이라 생각했던 모습이 예기치 못한 단점이 되기도 하고, 어디 갖다 버리고 싶던 단점이 삶의 어느 순간 돌파구를 찾아주기도 한다. 걱정 많은 부모도 때로 유익이고 걱정 없는 부모도 나름의 유익이리라 싶다. 중요한 건 마음이고,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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