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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plexArea Apr 19. 2018

[어떤 노트] 여성의 역사 - 지배와 성(性)

독서리서치클럽 '히스테리안' 2기 [미칠 撚] 지배와 성에 대한 짧은노트

여성의 역사와 모권제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고대 여성에 관한 연구는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상대적 지위를 분석하는 것이 주요 논쟁점이었다면, 70년대 이후에는 여성의 고유사, 즉 ‘여성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고대 여성사를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의 역사> 서문에서 미셸 페로는 여성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시켜 하나의 고립된 여성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닌 비관계의 역사, 일종의 관계사이자 관계-젠더사를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사’를 쓴다는 것은 기존의 남성사와 대립되는, 단순히 경쟁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보편사로 규정된 (남성)역사의 한계-역사를 재구성하는 것과 여성사는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요.

고대 여성사는 모권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19세기에 출간된 『모권』은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된 모권제에 대한 책입니다. 당시에 엄청난 혹평을 받았던 이 작품은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는데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저자 엥겔스는 이 책을 가리켜 “완전한 혁명”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엥겔스의 발언 이후 모권제에 관한 연구는 많은 주목을 받게 되며, 특히 페미니즘-역사가에게 중요한 지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젠더 :  여기서 젠더란 섹스나 섹슈얼리티 차이라는 말 대신에, 관계적 차원의 단어, 성에 기반을 둔 차이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림포스신화 이전의 그리스 여신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신화(그리스-로마신화)는 정복 신화이자 패권의 신화입니다. 기원전 7~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뒷세이아』에서 이 정복신화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러나 약한 의미에서의 모계적 관계들이 여전히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부터 제우스의 제왕적 신화가 시작되는데요, 이렇듯 올림포스 신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그리스신화를 복원하는 것이 모권 이론의 중요 부분이었습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접하고 있는 역사(신화)는 이미 가부장제 담론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러한 사료적 어려움으로 인해 모권이라는 가설의 영역이며 실증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북동쪽에서의 침입, 즉 도리스인의 침입(기원전 약 12세기) 전에는 ‘위대한 여신’이라고 불리는 지모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데메테르, 아테나, 헤라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리스인들의 침입(정복)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올림포스신화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는 암흑기를 겪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당시의 선형B문자를 비롯한 모든 문명 기록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는 ‘역사시대’ 이전의 고고학의 시대로 분류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량)에 와서야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모신 : 크레타섬을 비롯해 미노스 문명에는 인영모양의 출토품이나 벽화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4배나 더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여성혐오로 유명한 헤시오도스조차 최초의 사회는 여성지배사회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호메로스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거주형태에 있어서 젠더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기원전 600년경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젠더 구분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헤시오도스는 그 유명한 판도라라는 이미지로 젠더 이데올로기를 구축해 나갑니다. 기원전 8세기 급격한 인구 급증은 식량 수요 문제와 노동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헤시오도스는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아름다운 악’이라고 묘사하며 묘사하면 『신통기』에서 “제우스는 못된 짓을 하기로 공모한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악이 되게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판도라는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인간(남자)에게 내리는 일종의 벌이었던 셈이지요.      


제우스는 아프로디테에게 명하여 그녀의 머리 주위에 매력과 고통스런 그리움과 사지를 상하게 하는 상념을 쏟아 붓게 하셨소. 제우스는 또 헤르메스에게 명하여 그녀 안에 개의 마음과 교활한 기질을 넣게 하셨소.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헤시오도스는 최초의 여성 판도라에게 두 가지 본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프로디테가 판도라를 치장했다는 점에서 여자는 남자를 속이고 유혹하며 억제할 수 없는 쾌락적 본성을 가진다. 두 번째 헤르메스는 판도라를 “개의 마음과 교활한 기질”을 주며 남성을 속이는 협잡꾼으로 만들었다. 위의 두 가지 이미지는 <자궁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여성에 대한 고대적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여성은 본성적으로 자연에 가깝고 성적 방종을 즐기며,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으로 인도하고, 권력에로의 교활한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확인되는 ‘이브’와 판도라의 유사성을 고려했을 때 단순히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헤시오도스가 신화와 역사를 통일시키면서 하나의 건국신화와 같은 일들을 해내 갈 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바로 헤시오도스의 후예들입니다. 뒤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자리를 살펴보겠지만, 둘 다 어느 정도 헤시오도스가 마련해 놓은 지반 위에서 놀고 있는 셈입니다. 아마 이러한 여성에 대한 묘사들은 당시 인구급증과 식량 수요의 문제와 더불어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로 토양이 척박하여 올리브나무나 무화과나무가 재배될 뿐 늘 식량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철기로 제작된 기구를 다룰 수 있는 남성들에 비해 여성은 폴리스에 기여하는 것이 적어 보였습니다. 헤시오도스는 이를 여성을 ‘수벌’로 비유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가난은 수치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게으름뱅이는 명예롭지 못한 남성이 되는 것이고 곧 여성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다. 즉 나태함은 여성의 이미지였지요.

흔히 철학은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이행이라 얘기됩니다. 즉 오늘날 우리의 상식처럼 인간 문명은 발전하면 할수록 탈-종교화된다고 여겨집니다. 고대 청동기 시대의 모권제가 보여주는 종교적 사회의 쇠퇴는 여성의 공적 자리의 축소와 함께 합니다. 이미 역사시대인 헤시오도스가 보기에 여성의 일은 전혀 공적인 업무가 아니어서 폴리스와 국가에 기여를 전혀 못 하고 있는 잉여로 보인 셈입니다. 이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곧 폴리스 존속에 있어 두려움의 요소가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 <국가>에서 여성에게도 평등한 교육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성평등에 기초한 주장은 아닙니다.     

     


고대(고전기그리스에서의 지배와 성()

고전기 그리스는 기원전 4~6세기를 지칭하며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의 무대인 역사 시기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때 전통이란 호메로스·헤시오도스가 이미 2세기 전부터 만들어온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지금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젠더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폴리스에서 여성은 공직사회로 나갈 수 없으며 오로지 종교적 역할에서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데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이 그리스 언어를 사용한다는 (당시 야만인의 기준은 그리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타민족을 가리킨다는 것) 사실. 둘째 노예가 아닌 자유인인 점. 셋째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세 예시 모두 폴리스 사회에서 공직선출은 물론 선거권을 갖지 않는 비-시민에 속합니다.

우선 플라톤의 정치학에서 여성의 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궁은 아이를 생산하고 싶어 하는 짐승 안의 짐승이다. 그것이 여자들의 본질이며 모든 암컷의 본질”이라고 플라톤이 말했을 때 우리는 그가 여성의 자리를 깨끗하게 지워버릴 사람처럼 보입니다. 물론 플라톤 또한 전통의 상속자였기 때문에(사실 플라톤 본인은 전통과의 대립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에 대한 제한적 사고를 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직자의 자리(지배자)로 갈 수 있으며, 그러한 조건으로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아테네에서 교육은 시민(남성)의 특권으로 여성은 교육을 받지 못 했습니다. 의외로 플라톤은 신체적 차이는 국가업무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여성들을 약한 존재,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으나 교육을 통해 부분적으로 남성과 같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 스스로가 생각했듯이 당시의 인습을 파괴하는 주장을 펼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플라톤은 성평등에 입각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여성의 교육을 주장한 이유는, 만약 여성 교육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을 경우 인구의 반 정도가 국가 외부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면 국가의 손실은 갑절로 늘어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여성들은 그들의 고유의 질서가 필요하게 되며, 이는 여성들의 특징으로 보아 남성들보다 열등하게 구분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헤시오도스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역할을 거부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론과 가장 유사한 현실국가를 스파르타를 꼽고 있는데, 스파르타는 많은 면에서 이상 국가와 비슷하지만 여성 교육의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비롯한 강한 정치력 행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어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모든 부분―여성의 경제적 독립뿐만 아니라 동일한 교육의 권리 부여까지―을 거부하는데, 일체의 정치적(공적인) 영향력을 혹평합니다. 이는 자신의 철학에 기인한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형상론(목적론)에서 인간은 남성이기에 여성은 본성적으로 남성의 결여로 세팅됩니다. 교육을 통해 부분적으로 남성과 동일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이란 본성적으로 (남성에게)봉사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덕(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 즉 지배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성적 차이(이원성)를 고수하며, 이것을 거스르는 것은 반-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궁의 역사>에서도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에게는 ‘정액’이 없다고 생각하며―여기서 정액이란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액이 아니라, 생명 일반을 가능케 하는 능동인(작용인)으로써의 정액이다― 그저 수동적인 개체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세를 지배하고 있던 일원적 정액론을 거부한 이원 정액론은 전통에 근간한 당시의 패러다임에서는 반-권위적 반-자연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성()

13세기(르네상스) 말경이 되면 가족이나 사회 안에서 여성에게 할당된 역할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의학 담론이 동원됩니다.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설과 여성을 기괴하고 독특한 기관, 자궁과 연결시키는 갈레누스의 학설 사이에서 계속된 동요가 일어납니다. 이 시기에 진전되는 해부학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여성 담론은 위의 전통적인 두 가지 논법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받습니다. 전통적 권위를 내포한 이러한 담론들은 전통적인 의학사와 비춰보았을 때 전환과 시대구분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레의 경우처럼 여성에게서 자궁은 특수한 기관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예외 없는 진실, ‘즉 여자는 남자를 뒤집은 것’이라는 간결하게 말합니다.

당시 의학자들은 기존의 전통적 견해를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 자연의 기묘한 실수, 남성의 결여로 설명되는 여성 존재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갈레누스의 체액설은 딱 들어맞는 이론인데, “여성은 냉하고 습한 체액을 가졌기 때문에 여성의 난소도 남성보다 냉하고 생기가 없다는 것이다. 또 이처럼 냉한 것은 물건을 수축시키고 단단히 죄므로 여성의 난소는 태양이 없으면 절대 꽃이 피지 않듯이 안에 숨겨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무능하고 허약하고 규정된 여성의 신체는 동물과 남성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계층적인 견해에 딱 들어맞았다”(<여성의 역사 3 - 하>, 503쪽)

특히 월경은 기능부전의 중요한 징후로 ‘과잉 성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학설에 따라 여성의 체액이 습하고 차갑기 때문에 모든 영양분이 유용한 피로 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월경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월경은 17세기의 산부인과 의사 모리소가 ‘난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당대의 모리소의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기 과학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론은 고대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또한, 새롭게 부상하는 생리학의 영역은 위의 이론에 입각해 여성의 지적ㆍ도덕적 속성을 묘사하며 전통적 질서를 되려 강회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약하고, 화를 잘 내며, 질투가 많고,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반면에 남성은 요기 있고, 사려 깊으며, 냉정하고 유능했다. 르네상스 과학은 이런 성질이 여성 체액의 구조상 필연적이며 운명적인 것임을 입증하려 했다. (<여성의 역사 3 - 하>, 505쪽) 

         

전통과 과학 담론은 끊임없이 마찰을 빚게 되고 16세기 이후가 되면 의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은 더 이상 고대의 논의에 만족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해부학적 관찰과 치료법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담론은 특정한 세계 질서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갑니다. 현 질서를 정당화하고 효과적으로 변호할 방법은 여성 전체를 기관의 특수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즉, 자궁입니다. 이제 여성은 신학에서 기관으로, 여성은 몸 안에 있는 기묘한 기관의 포로에 선고됩니다. 19세기에 모성 담론에 대한 강화가 일어나는데, 당시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여성에 대한 적대 담론으로 활용됩니다. ‘말하는 메두사’로 불렸던 여성들은 여성의 본질적 역할, 즉 신이 내린 소명이자 사회적 재생산의 ‘모태’인 ‘어머니’의 역할을 등한시하는 부도덕한 여자가 되는 셈이지요. 다시 한번 여성의 자리는 자궁으로 돌려보내지고 있습니다. 한 신체 기관으로 설명되는 여성에 대한 당혹스러운 이미지는 그 배면에 하나의 물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정말 인간일까?”

이 논쟁의 기원은 6세기 한 사교 회의에서 주교가 여성은 ‘인간’이란 이름에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심지어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에 각종 클럽의 연단에서 여성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주장을 비판하고 나서야 했는데, “여성이 영혼을 가졌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담론들은 우습지 않은 심각한 사회적 현상을 보여줍니다. “자궁의 특수성과 일종의 분리주의적인 반응, 다시 말해 여성을 인간과는 전혀 무관한 괴물로 낙인찍는 반응 간의 미묘한 연결고리”를 말이지요.     


태아의 형성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학파들 간의 다툼을 넘어섰다. 왜냐하면 여성의 도덕적 지위는 여성의 출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종자의 능동적인 힘을 통해 생식에 참가한다면 여성은 적어도 이 생식 행위에서 남성보다 우월하지 않지만 대등해진다. 더구나 여성은 나중에 즉 임신 중에는 혼자서 태아에게 영양까지 제공해 준다. 그러니 이처럼 여성이 불완전하고 허약하며 부족한 존재라는 모든 편견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이러한 생각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가족과 사회 안에서 남성이 가진 권력의 전통성이 핵심적인 문제였다. (<여성의 역사 3 - 하>, 505쪽)          



독서리서치클럽 '히스테리안' 

https://www.instagram.com/hysterian.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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