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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ze Apr 11. 2021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호비클럽썸머시즌: 여름 시선


호비클럽의 공식적인 첫 시즌은 여름 시즌이었다. 

신났던 '막걸리 플렉스'를 마친 뒤에 이제 몇 개월 동안 함께 멤버를 이끌어가야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작은 고민이 생겼다. 


업무로 피곤한 날에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는 것도, 주말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느라 정작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든 것과 같이 나의 일상에 균열이 간다고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그건 원치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면서 균형을 지켜야 했다. 일과 가족과의 일상 중간에 나 스스로를 탐구하고, 다른 세상을 탐색할 에너지를 남겨둬야 했다. 


모임 겸 회의를 위해 모인 날 주말, 모이자마자 서로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했다.

"야, 나 뭘 위해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어"라고 솔직히 말했다. 셋이 한참을 얘기하다 내린 결론은 길게 가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고,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된다는 것이었다.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 정기 시즌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입사 5주년이었던 날 일찍 퇴근해 한남동의 카페에 앉아 이런 고민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모두 적기 시작했다. '내가 호비 클럽을 하는 이유'라는 이름으로. 


나는 내가 무슨 일까지 해볼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이 궁금하다. 파일럿 시즌을 하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지만 바쁜 일상에 버겁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일을 시작한 지 5년 차가 지나고 팀장님에게 '경력이 쌓이는 게 무섭다. 경력만큼 내 속이 가득 차지 않을까 봐 겁이 난다'라고 했더니 '이미 충분하다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흡수하는 걸 정말 잘하니까 브랜딩이라는 강점을 살려 나만의 키워드를 찾아보라고' 하셨었다. 호비 클럽을 하면서도 브랜드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재밌었다. 
어쩌면 '좋아하는 것'들을 깊게 파는 이번 시즌이 그 시작일 수도 있다. 나의 삶, 일, 가족, 취미,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면서 정말 나를 또렷하고 단단하게 만들어가자.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해 보자. 여름 시즌을 하면서 내 스타일과 색을 조금 더 찾아가고 싶다. 건강하게, 재밌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자.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그런 순간을 자주 만들자.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바라보냐는 거다. 


이 글을 적고, 조재와 윤영이를 바로 만나 '하자!' 고 크게 외쳤다. 하자고 하자고!!! 더 재밌고, 건강하게 만들어보자고. 


그리곤 7-9월 동안 2주 간격으로 진행되려던 초기 기획을 7-8월 동안 3주 간격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대폭 변경했다. 촘촘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보다 우리가 천천히 끌고 갈 수 있는 우리의 속도가 중요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hobbyclub summer season,

여름 시선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처음에 여름 시즌 후보 아이템은 도예, 목공, 우드 카빙, 라탄 등등 다양한 클래스를 함께 도전해보는 것으로 추려졌다. 그러다 보니 공방과의 협업, 더 나아가 클래스 매칭 서비스에서 콜라보 제안까지 왔다. 공방과의 원활한 프로그램 연결뿐 아니라 전문적인 촬영 감독님을 통한 콘텐츠 제작까지 지원해준다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강남에서 모인 어느 날, 서비스 담당자와의 회의를 마치고, 우리끼리 얘기를 다시 해봤다.

"이거 아니지 않아? 우리 색이 없잖아."

콜라보를 하게 되면 좀 더 규모 있게, 편하게, 전문적이게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첫 시도인 우리의 색이 잡히기도 전에 타인의 색에 묻히긴 싫었다. 그 순간 생각난 문장이 있었다.


'아무튼 여름'의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라는 문장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이 책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리곤 이전에 나왔던 아이템이었던 '필름 카메라' 찍기가 다시 화두에 올랐다. 파일럿 프로그램 때 포스터를 인화하며, 내가 찍은 사진을 함께 포스터로 제작했는데 그게 꽤 괜찮았다.


가장 지친 시기에 3일간의 시간이 생겨 거제도로 향했던 여행. 남해의 잔잔한 물결과 윤슬을 보고 또 보다가, 필름 카메라에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왔다. 인생 3대 과제인 필름 스캔하기를 끝내니 지난 바다 시선이 함께 따라왔다. 그냥 두기엔 아까워 큼직하게 뽑아 자기 전 가장 자주 눈길이 닿는 곳에 세워두었다. 작은 프레임이 언제고 파도소리가 찰랑거리는 거제도로 나를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이걸 함께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올여름 호 비어들과 함께 필름 카메라로 여름의 시선을 담아 굿즈를 만드는 거다. 작은 액자 속에 담아 집 한켠에 두고두고 보면 언제고 나를 웃게 할 작은 기쁨이 하나 더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정한 여름 시즌의 이름은 '여름 시선'

우리가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나만의 포스터를 만든다. '아무튼 여름'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 적힌 호비 노트를 만들어 함께 답을 찾아나간다.


순식간에 우리의 색이 담긴 여름 시즌 프로그램이 나왔다. "야! 이거지" 하고 카페 한복판에서 손을 잡고 둥실둥실했다. 그래, 우리가 만드는 건 이런 거지. 남들이 만드는 거에 숟가락 얹는 거 아니고, 진짜 우리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해야지. 그게 우리가 호비 클럽을 하는 이유였지. 


이번엔 정규시즌인 만큼 키트와 프로그램 자체도 더 정성스럽게 준비했고, 무엇보다 웰컴 키트에 정성을 쏟았다. 


여름 시선을 대신 담아내 줄 리사이클링 펀 세이버.

여름 내내 필름 카메라를 지니고 다녀야 하니, 작지만 예쁜 빛깔의 파우치. 파우치에는 우리의 옛 친구인 개삐가 한 땀 한 땀 자수로 호비클럽 슬로건인 be hobby, be happy를 새겨주었다.


그리고 

여름날의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아무튼 여름’

조금 지친 날엔 나의 위로가 되어줄 ‘마법의 티’.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40가지 질문이 담긴 호비 노트’가 담겼다. 



그렇게 모인 여름 시즌 멤버가 9명이다. 

2개월 동안 진행될 여름 시즌은 몇 가지의 룰이 있었다.  


첫 모임은 호비 노트를 적고, 소개를 하는 날이고요. 두 번째 모임은 서울숲에서 다 같이 필름 카메라를 찍으러 갈 거예요. 마지막 모임은 저희가 만들어드리는 굿즈를 받고, 같이 남은 호비 노트를 적는 날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10장의 시선은 필름 카메라로 남겨주세요. 마지막 5장은 여름날 서울숲에서 같이 찍어요.
여름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에세이인 '아무튼 여름'을 함께 읽어요. 서울숲에 가는 날 가장 좋았던 문장을 멤버들에게 선물할 거예요.
정말 힘든 날 붉은 실로 묶인 마법의 티를 타서 드셔 보세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거예요.
첫 모임에서 호비 노트의 10번까지 함께 나눠요. 나머지 20개는 맘대로, 내킬 때, 내키는 부분부터 적어주시고요. 그리고 마지막 모임 때 나머지 10개의 질문을 함께 적어요. 2개월 전과 후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굿즈는 포스터 1장, 엽서 5장, 달력 2장을 만들어드릴 거랍니다! 



첫 모임에서 호비 노트의 10번까지를 함께 나누며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필름 카메라를 한 장씩 찍었다. 각자의 취미가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다르다 보니 '같이 해봐요!' 하는 것들이 정말 많아졌다. 그 해 여름에 클라이밍과 서핑을 가기로도 했고, '호비 책방'을 만들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책을 나누기도 하자고 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많은 일상 이야기를 나누진 않지만 같은 것을 고민하고, 도전한다는 연대가 있다.


그 날 이후로 우리 멤버들은 필름 카메라가 든 파우치를 챙겨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 났을 비 오는 날도 '비 오는 날을 필카로 찍으면 무슨 느낌일까?'라는 생각으로 챙겨나갔고, 아무리 바빠도 2개월 뒤에 내가 남길 사진들을 생각하면 당연했던 일상에서도 한 장씩 더 찍게 된다고 했다. 


정말 좋았다. 필름 카메라 덕분에 당연했던 일상을 한 번 더 쳐다보면서 뭐가 다른지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내가 기억하고 싶은 소소한 일상을 찍어서 남겨두는 것. 당연한 매일에 평범한 일상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만드는 재밌는 습관과 장치가 하나 더 생긴 것. 매일매일 카톡방에는 오늘 자신이 담았던 시선을 한 번 더 공유해주는 다정한 카톡이 올라왔다. 오늘 이 장면을 보고 너무 좋아서 남겼는데, 같이 보자며. 


첫 모임이 끝난 뒤에 호비 노트 맨 뒷장의 그 날의 메모를 짤막하게 남겼다. 


역시 할까 말까 할 때는 해야 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았다. 잠옷 입고 노래 빵빵 틀고 야밤 드라이브하는 것과 비 오는 날 문 다 열고 인센스 스틱 펴기.



seoul forest 5pm

각자의 일상에서 필름 카메라를 찍는 것도 물론 좋지만, 다 함께 같은 풍경에 들어가서 각자의 시선을 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자연이 많고, 다양한 시선을 담을 수 있는 곳. 서울숲이 떠올랐다. 오후 다섯 시쯤의 서울숲. 너무 이른 시간도, 해가 질 것 같은 늦은 시간도 아닌 노란빛이 내려앉는 시간이다.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빛에도 온도와 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는 새벽의 노란색과 오후 다섯 시쯤의 노란빛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멤버들과 다 같이 가기 전 우리 셋이 먼저 답사를 가기로 했다. 


찍을 만한 장소는 있을지, 사진 찍기는 괜찮은 장소인지. 

오후 다섯 시의 서울숲은 완벽한 빛과 온도였다. 초록색 위에 따뜻한 노란빛이 내려앉으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됐다. 모든 건 완벽했다. 사진을 찍기 좋은 스팟을 체크해서 나름의 지도도 만들어두었고, 이제 멤버들과 함께 오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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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서울숲 

큰일이다. 출사를 가기로 한 날 비예보가 있었다. 실내로 갈 수 있는 식목원을 가야 할지, 날짜를 미뤄야 할지 난감했다. 출사를 가기 전 날 우선 다섯 시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도 다섯 시엔 비가 멈췄고, 비가 온 뒤의 서울 숲에는 노란빛은 없었지만 짙고, 깊은 초록색이 우거져있었다. 돌아다니며 각자의 시선을 남겼고, 나는 마지막 날 멤버들에게 줄 선물을 위해 멤버들이 필름 카메라를 찍는 그 장면을 필름 카메라로 분주하게 남겼다. 짙은 초록색 사이에서 걸어가는 태연님의 노란 블라우스는 서울숲 한복판에 핀 꽃같이 아름다웠고, 그 풍경 속에 있는 멤버들이 너무 싱그러웠다. 


그 날 바지 끝단이 푹 젖어가며, 필름 카메라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때까지 모든 시선을 남겼다. 

서울숲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그동안 각자 적었던 호비 노트의 답들을 나눴고, '아무튼 여름'의 문장들을 나눴다. 마지막엔 알코올도 나누고.




시선이 담긴 선물이 도착했다. 


멤버들의 일상과 서울숲에서 담았던 시선을 포스터, 엽서, 달력으로 만들었다. 나의 수많은 사진 중 어떤 것을 골라 방 한편에 붙여놓을지 고민하느라 지난여름을 더 깊게 깊게 들여다봤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할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 고민하면서. 


내가 고른 사진은 엄마와 함께 떠난 제주 백패킹의 풍경과 비행기 안에서 보는 구름 사진이었다. 

저 사진이라면 언제든지 나를 금방 행복하게 할 것 같았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혹독했다. 날이 좋으면 코로나로 망설여지고, 그렇지 않은 날엔 내내 비가 와서 흐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름 내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우리의 시선으로 굿즈를 만들었다. 코로나로 마지막 모임이 취소된 바람에 모든 시선과 몰래 따라다니며 찍었던 그들의 모습 뒤에 편지를 적어 택배로 보냈다.


멤버들에 방 한 켠에 포스터를 붙여놓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고, 다가오는 여름에는 작년 우리가 담았던 시선의 달력을 붙여놓겠지. 


모두가 아쉬웠던 여름이지만 새로운 필름카메라라는 취미가 생겼고, 시선이 닿는 곳에 둘 나만의 굿즈가 생겨 우리의 여름은 아쉽지만은 않았다. 


아! 우리 멤버 태연님이 그러더라고. 기대했던 뜨거운 여름날은 아니었지만 필름 카메라로 일상 속 사진 찍기를 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이것마저 여름이어서 좋았던. 우리의 여름 시선 덕분에 길고, 진하게 남았다. 




아쉽게 마지막 모임은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지만 이렇게 줌으로나마 서로의 방에 놓인 굿즈를 자랑하고, 호비 노트를 읽어주면서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의 지난여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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