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생각에 짧은 꿈을 꾼듯하기도 하고,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에어컨을 꺼놓았는데도 덥지는 않아 이불을 폭 감싸서 뒤척이기도 하다가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출입문 밑 틈새로 복도의 빛이 스며들어오고 낯선 라오스말이 들리는 가운데 나는 눈을 껌뻑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 그렇지. 여기는 작고, 소박하고, 안락한 나의 방이 아니지.
윙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는 듯한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들이켜고 간단히 세수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새벽에 나를 맞아준, 온몸에 문신을 한 남자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는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기분 좋은 채광이 비치는 1층 실내에는 서양인들이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하다 말고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입구밖에는 환한 햇살이 내리쬐어 공중에 매달아 놓은 화분의 식물들이 반짝였다. 나는 간밤의 실망은 금세 잊고 테라스에 잠시 앉아 거리를 살펴보았다. 바로 옆 식당에는 아침을 먹는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었고, 긴 거리를 따라 낡고 오래되었지만 운치 있는 건물들과, 아침부터 툭툭이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정지된 화면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게으른 기지개를 한껏 켜고 다시 실내로 들어오니 호텔 직원이 아침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오믈렛, 바케트 빵, 팬 케이크 정도로 구성된 조촐한 식단에서 커피와 오믈렛을 주문하고 나는 제법 익숙한 여행자인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느리고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식사였지만, 커피도 훌륭했고 간단히 아침 한 끼를 때우기에는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느긋하게 밖으로 다시 나오니 서양인들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에 한참을 못 미치는 나도, 그들에 비하면 이곳 여행지에서조차 바쁘기 그지없는 한국인일 것이다.
그늘이 드리운 인도 쪽을 따라 거리로 나섰다. 역시나 식당에 앉아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망중한에 젖은 모습의 서양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에 반해 자신의 상체만큼 큰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도 모자라, 앞쪽으로 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뜨거운 햇볕 아래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젊은 백인들도 보였다. 이곳의 더위는 낮시간에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하기에는 쉽게 몸이 움직여지질 않을 텐데, 하얀 피부가 벌겋게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탐험가라도 된냥 열심히 걸어 다니는 그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가로수가 멋지게 드리워진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켜 야외에 앉아, 이제 나도 이곳 여행자의 일원이 된듯한 왠지 모를 우쭐함에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오토바이와 툭툭이, 자동차들을 제외하고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이곳에서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여행자와 개밖에 없다고 누군가 농당처럼 말을 한 것을 들었는데, 카페 그늘에 앉아 찬찬히 거리를 살펴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2월의 비엔티안이 이 정도의 더위라면 한여름의 날씨는 어떤 것일까.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멀리 불빛에 감싸인 빠뚜사이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빠뚜사이는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세운 것인데, 파리의 개선문과 흡사한 모습이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나면 분명한 명암을 남긴다. 그리고 그 남겨진 것으로 인해 문화가 형성되고, 나라의 색깔이 변하고 갖추어진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세계사에서 그토록 많은 침략과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비엔티안에서 꽤 이름이 알려졌다는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가니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었다. 친절한 레스토랑 주인은 미안해하며 맞은편 딤섬집이 아주 훌륭하다고 소개해주었다. 비엔티안 곳곳에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들이 넘쳐났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고급 프랑스 요리를 맛보고 싶었으나, 아쉬운 마음으로 주인이 소개해준 딤섬집으로 향했다.
딤섬집 내부는 비엔티안에서 보기 드물게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추었고 최신 팝송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곳의 서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메뉴판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두어 가지 시키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대가족이 어느새 들어와서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노부부와 그들의 딸로 보이는 여자와 사위, 그리고 세명의 어린 자식들. 금목걸이를 두르고 얼굴에 욕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내부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젊은 여자의 모습에서, 나는 한국에서 간혹 보았던 탐욕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이 보여 내심 놀랐다. 어느 곳을 가든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은 공통점이 있구나.
행복이 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겠지만, 이토록 가난한 나라에서조차 일반 서민들의 표정이 더 밝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내가 여행자여서 느끼는 감정일 뿐일까.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이곳에서도 별다르지 않다. 식당을 나와 메콩강을 왼쪽에 끼고 천천히 걸으니 낮보다 한결 내려간 기온에 기분이 상쾌했다. 이곳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구나.
탄내 같기도 하고, 매연 냄새 같기도 한데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라오스에 있는 동안 어디를 가든 줄곧 그 냄새를 느낄 수 있었는데, 특히 해가 질 무렵 그 냄새가 느껴질 때면 어릴 적 골목에서 동무들과 골목을 뛰어다니던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왜 그런 추억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특유의 냄새는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아마 그래서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여행자 거리로 들어서니 제법 많은 차들이 지나다니고 사람들도 북적였다.
낡고 창문도 없는 낯선 숙소이지만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우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구나 싶다. 이 세상 어느 곳이든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것이 곧 천국일 것이다. 그러나 불현듯 훅 들어오는 외로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리 검색해 둔, 멋진 실력의 뮤지션들이 라이브 음악을 들려준다는 펍에 가기 위해 나서니 숙소 바로 앞의 술집에는 현지 젊은이들로 보이는 이들이 가득히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시끌벅쩍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며 눈웃음을 쳤다. 홀린 듯 나도 모르게 가까이 가니 여자의 일행들이 의자를 내어주며 반겨주었다. 남자 셋,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된 청춘들. 그러나 가까이서보니 나를 부른 사람은 레이디보이였다. 졸지에 4명의 젊은 라오스 남자와 한국에서 온 올드 까올리가 한 테이블에 앉아 뜬금없이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국의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긴 레오라는 친구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중간에서 통역을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번역기를 동시에 쓰면서 나는 어느새 그들과 어울려 한껏 흥이 올랐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일행 네 명이 더와서 합류하게 되었다. 여자 둘, 남자 둘. 그런데 이번에는 진한 화장과 늘씬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보아도 그들이 레이디보이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아무렴 어때.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어울리는 그들 모습이 짧은 순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해를 하려고도, 판단을 하려고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내 속의 오만일 뿐이지 않을까. 태어난 곳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데 무슨 잣대로 내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저마다의 인연이 있다. 눈길이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 우연히 듣게 된 감동적인 음악, 나의 발길을 사로잡는 그 모든 인연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그들은 지치지 않고 맥주를 마셨고 나에게도 끊임없이 권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펍이 있다고 말하니, 그렇지 않아도 그들 중 일부도 그곳으로 2차를 갈 것이라며 조금 있다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너무 술을 많이 마시면 곤란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맥주를 계속 마시니 배가 너무 불러 먼저 가야겠다고 말하고 지갑을 꺼내니 한사코 거부했다. 여기가 세계 최저빈국 중에 하나가 맞는 것인가. 레오에게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wind west. 펍의 이름에서 벌써 이국냄새가 물씬 풍기는 실내로 들어서니 입구에서부터 멋진 연주에 어우러진 팝송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안경을 쓰고 짧은 턱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가 기타를 치며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르고 있었다.
welcome to the hotel california
such a lovely place
such a lovely place
그렇군요. 이곳은 정말 멋진 곳이군요.
그리 크지 않은 실내에는 현지인들과 외국인들이 한데 섞여 음악에 맞춰 어울려 춤을 추고, 들뜨고, 황홀한 열기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라이브 음악의 수준이 굉장했다. 비엔티안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밤에 이곳에 들렀는데, 여러 명의 뮤지션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자신의 시간을 채웠다. 라오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는, 더구나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곳은 정말 드문 곳이었고, 서양인들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들도 이곳이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 등 좀 더 기회가 많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더 알리고 훌륭한 음악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안타까웠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고 살아간다.
음악과 분위기에 흠뻑 취해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가 다 되어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그제야 아까 펍에서 만난 일행들 중 레오와 레이디보이만 펍으로 들어왔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짧게 포옹을 하고 나는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