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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0. 2024

Perfect day


해가 뜨는 새벽 풍경을 꼭 보고 싶다는 열망에 피곤도 잊은 채, 다음날 알람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새벽풍경이 큰 창밖으로 아름답게 펼쳐졌다. 높은 건물이 없고, 낮은 집들과 산과, 강과, 우거진 나무들이 펼쳐진 풍경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밝아지는 풍경을,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충만한 안락함이라니.

연한 회색빛이던 풍경이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서서히 선명해질 때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로 베란다로 나가서 아침의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나니 조금 출출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거리를 나서 스쿠터를 타고 숙소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커피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컵짜이더라는 레스토랑은 비엔티안에도 있는데, 다양한 메뉴와 훌륭한 맛으로 여행자들-특히 서양인들-에게 꽤 인기가 있다. 제법 큰 레스토랑 안에는 아침부터 손님들이 곳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양상추와 방울토마토를 비롯해서 싱싱한 견과류와 채소들이 들어있는 샐러드를 커피와 같이 먹으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딱히 중요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른한 실내 분위기가 좋아서 나는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바깥풍경은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소도시 읍내의 평화로움만이 가득했다.

나는 스쿠터를 반납하기 전에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아주 미세하게 바람이 불어 기분이 상쾌했다.


방비엥의 여행자 거리는 걸어서도 두어 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음식점과 마사지 가게, 숙박업소와 카페, 술집, 잡화상 등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작고 소박한 편의 시설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스쿠터를 몰면서 골목이 나오면 그냥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특별히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은 읍내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기분이 마냥 쏠쏠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다가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기차를 예약하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켜고 방비엥역으로 향했다. 여행자거리를 조금 벗어나자마자 비포장도로는 먼지로 가득했고 한산한 길에는 가끔 큰 트럭이 지나다녔다. 15분도 채 못되어 기차역 입구로 들어서니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이 펼쳐지고 멀리 방비엥역이 보였다. 역 앞에 도착해서 보니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커 보였다. 중국 자본으로 지어졌다는 말이 확연히 실감 날 만큼 규모도, 스타일도 딱 중국스럽다고 해야 할까.

무표정한 역무원이 표를 건네주며, 루앙프라방 기차역과 시간이 적힌 표에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다.


오후 여섯 시 반에 아랑과 약속한 식당으로 가니 어제 낮에 블루라군3에서 보았던 커플이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귀여운 곱슬머리를 한 흑인 혼혈처럼 보이는 남자는 백인 여자에게 바짝 붙어 연신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고, 식사도중 같이 담배를 태우며 함께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괜한 마음에 혹시 나를 알아볼까 싶어 눈길을 주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빈 테이블에 앉아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니 앳된 얼굴의 소녀가 와서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나는 번역기를 보여주며 친구가 올 것이니 이따가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며 소녀가 돌아가고 나서도 아랑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약속시간은 벌써 이십여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아! 괜한 약속을 했던 것일까. 나는 왜 그런 철부지 같은 약속을 믿고 이 자리에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알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한 메뉴판을 보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드는 순간, 입구에서 밝은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아랑이 들어왔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도 반가울 수 있구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하고, 가벼운 포옹을 했다. 아랑은 수줍게 웃었다.


둥근 화로에 고기와 각종 야채, 해산물을 올리고 육수까지 같이 부어서 먹는 음식인데 한국인들은 신닷이라고 불렀다. 낮에 채팅으로 아랑에게 제안하니 자신도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식당의 위치를 안내해 주었다.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할지 몰라 아랑에게 대신 주문을 시켰다. 접시를 들고 능숙하게 고기와 각종 야채를 들고 온 아랑은 손수 구워주고 나의 접시에도 올려주었다. 샤부샤부와 비슷했는데 소스도 아주 맛있고, 국물도 시원하니 입맛에 딱 맞았다. 비어라오를 주문하고, 같이 식사를 해줘서 고맙다고 건배를 했다.

"근데, 아랑 오늘 블루라군에서 여기까지 나온 거예요?"

"아니에요. 어제는 여기 친구집에서 잤어요. 밤에는 너무 어둡고 집에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아... 그럼 친구들과 놀려고 나온 건데 나 때문에 괜히..."

말을 하고 보니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하하, 아니에요. 어차피 오늘 아빠가 나오시니 여기 있어야 해요."

"아... 네. 아빠...

뭔가 더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나는 우리 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워있는 고양이를 괜히 바라보았다.

"홍은 그냥 여행 온 거죠? 일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네, 비엔티안에 있다가 여기로 온 거예요. 내일은 루앙프라방으로 갈려고 기차를 예약해 두었는데... 방비엥이 참 좋아요."

"그래요? 여긴 그냥 뭐... 그래요. 좋죠."

아랑은 집게로 야채를 듬뿍 집어 화로에 추가로 넣었다.

"근데 홍은 몇 살이에요? 아이는 있어요?"

"하하, 몇 살로 보이나요?"

"음... 서른넷?"

"땡큐! 아랑. 하하"

나는 좀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닌가요? 몇 살이죠?"

"비밀이에요. 하하. 근데 난 아이가 없어요. 결혼 안 했어요."

"진짜요? 왜요...? 음... 결혼 생각이 없는 건가요?"

"글쎄요.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근데 아랑은 몇 살인가요? 결혼했어요?"

"아, 난 스물여섯이에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 늙어버렸어..."

늙어 버렸다는 번역기의 표현이 나는 좀 우스웠다.

"에이, 늙다니 무슨 그런 말을... 이제 스물여섯이에요. 스물여섯!"

"여기에서는 완전 노처녀예요."

살짝 표정이 어두워지며 아랑이 말했다.

"아... 하하, 한국에서는 한참 나이인데, 설마 그래서 결혼 생각이 없다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돈을 벌어야 해요. 그래서 집을 짓고 가족들과 살려고요."

"그렇지만 돈은 결혼해서도 벌 수 있고, 또..."

"네. 근데 아빠와, 엄마, 동생들 모두 지금보다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돈을 많이 모아야 해요."

나는 맥주를 마시며 아랑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유독 하얀 것이 여느 동남아 여자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혹시... 무슨 일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 그냥... 아빠와 같이 뭘 좀 하려고 계획 중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아빠와 만나는 거고..."

"그래요. 어쨌든 그게 잘 되어서 아랑이 돈을 많이 벌면 좋겠네요. 멋진 집도 짓고요."

내 대답에 아랑이 환하게 웃었다.

"근데 홍은 좀... 슬퍼 보여요."

아랑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요? 아..."

갑작스러운 아랑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네. 어제도 내가 홍에게 말을 걸었어요. 오늘도 그래요. 슬픈 일이 있나요? 혹시... 그래서 여행을 온 건가요?"

나는 폰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며 괜히 멋쩍게 웃었다. 슬퍼 보여서 어제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하, 아니에요.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아... 몰랐어요. 내가 슬퍼 보이는지. 혼자 여행을 와서 그럴지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냥 눈이 좀 슬퍼 보여서... 신경 쓰지 말아요."

아랑이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내 얼굴에 가득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표정을 감출 수 없다면 그녀의 시각은 일리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꼭 행복해지기 위해서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권태로운 일상에 나는 지쳐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선 것일 게다. 나는 여행이 일상의 연장이 되길 바라면서도 낯선 환경에 속수무책으로 쩔쩔매고 있는 것일까.


"근데 홍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잠깐 상념에 젖은 내게 아랑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네, 맞아요. 나는 알 수 있어요. 슬퍼 보이지만 홍은 참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어요. 눈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하하, 뭐 더 먹고 싶나요?"

내 장난스러운 제안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외로우면 여기 라오스에 오세요. 여기에는 홍에게 어울린만한 좋은 여자들이 많아요."

"하하, 결국 내가 외로워 보였군요. 근데 난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나이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요."

내 대답에 아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난... 음... 홍이 좋은 사람이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기를 바라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말이라도 고맙네요. 그러면 내가 라오스에 와서 아랑과 함께 살면 되겠네요. 아랑도 좋은 사람인데요."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며 아랑은 수줍게 웃다가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하, 나는 일을 해야 해요... 고마워요. 홍."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가게 안에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라오스풍의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그 특유의 멜로디는 어디에서나 흘러나왔는데 이제 제법 적응이 되었는지 정겹게 들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참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여기 식당이 참 좋아요.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고, 운치도 있고..."

화로에 있는 음식이 거의 다 비워지고 비어라오를 한병 더 시키면서 아랑에게 말했다.

"네, 여기 아주 맛있어요. 나도 가끔 오는 곳이에요."

"네, 혹시 더 시킬까요? 음식이 모자라지 않나요?"

"하하, 아니에요. 너무 많이 먹었어요."

아랑이 자신의 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다시 건배를 하고, 고양이를 바라보고, 그냥 말없이 웃다가 또 건배를 하고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갈까요? 시간이 빨리 가네요."

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마시며 내가 말했다.

"네, 이제 가요. 나도 가야 할 시간이에요."


두 명이서 배가 부르도록 음식을 먹고 비어라오도 네 병이나 마셨는데 겨우 사십만 킵 조금 넘는 돈이 나왔다. 우리 돈으로 3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잘 먹었어요, 홍.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랑 덕분에 내가 즐거웠죠."

식당을 나와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어젯밤에 들렀던 사쿠라 바가 보였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밤과 낮은 애초에 왜 구분되었던 것일까.

"홍, 나는 여기서 툭툭이를 타면 돼요."

툭툭이가 여러 대 서있는 길가에서 아랑이 말했다.

"아, 네, 그래요. 즐거웠어요. 같이 식사해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네, 즐거운 여행하고 건강해요."

"아랑도 건강하게 지내요. 혹시... 내가 다시 여기 오면... 만날 수 있겠죠?"

"하하. 아마도요... 언제 또 올 건가요?"

"네, 꼭 다시 오고 싶어요."

비스듬하게 누워서 폰을 들여다보던 툭툭이 기사는 아랑이 다가가자 벌떡 일어나서 무심하게 아랑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 다소곳이 앉아 아랑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도 아랑의 눈에는 내가 슬퍼 보일까.

부릉, 기름 냄새를 풍기며 툭툭이가 출발했다. 아랑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툭툭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기사에게 차비를 물어보고 미리 줄 생각을 왜 못했는지, 그제야 생각이 나서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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