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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0. 2024

틈과 틈 사이


여행을 온 뒤로 이상하게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평소에 7,8시간 이상을 자는 습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면으로 인해 피로할 만도 한데 아침이면 또 일찍 눈이 떠졌다. 어떤 기대감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평소에는 특별한 기대가 없다는 것일까.

오후 2시 기차시간까지는 여유시간이 충분해서 베란다에 나가 풍경을 보다가 보트를 타보고 싶어 남쏭강으로 내려갔다.

강에는 단체로 온 여행객들이 여러 대의 보트에 나눠 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혼자인 나는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친절한 뱃사공의 안내에 따라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에 올라 한중간에 앉았다. 모터소리와 함께 보트는 강을 가르며 시원하게 출발했다. 강 위에는 여러 대의 보트들이 사람들을 태워 오가고 있었고, 강 주변으로 펼쳐진 나무들과 짓다만 집들이 정겹게 펼쳐졌다. 물소 떼를 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손을 뻗어 강물에 손을 담그니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반대편에서 오는 보트에 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얼른 폰을 꺼내 그들의 모습을 촬영하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보트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곳에서 반환점을 돌아 다시 달렸고 맞은편에서는 또 새로운 보트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오고 있었다. 이 강 위에는 우리가 여기 지구에 수도 없이 왔다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고 갈 것이다. 다시 선착장에 도착해서 뱃사공에게 컵짜이라고 인사하니, 뱃사공은 순박한 미소를 보여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숙소로 오는 길에 소박해 보이는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카운터 위에는 고양이가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파란 천이 깔린 둥근 테이블에 앉아, 내가 입으로 쯧쯧하고 소리를 내니 고양이는 한번 힐끗 나를 보고는 외면해 버렸다. 

저기요, 냥이씨. 이 집에는 뭐가 제일 맛나나요? 그래요, 쌀국수로 할게요.

고기가 들어간 쌀국수는 양이 곱빼기처럼 그릇에 가득했다. 여기에서는 쌀국수가 맛이 없기도 힘든 모양이군. 국물까지 말끔히 비우고 숙소에 도착하니 데스크에서 곱슬머리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덕분에 이틀 동안 잘 있었어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아, 난 타오라고 해요."

곱슬머리 직원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근데, 타오는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어요? 라오스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던데..."

"아, 어쩌다 보니 배우게 되었어요. 그냥 어느 정도 하는 거예요."

"아! 하긴 나도 잘하지는 못해요. 근데 타오는 몇 살인가요?"

"난 20살이에요. 헤헤"

"와! 멋지네요!"

그제야 자세히 보니 눈빛도 영민해 보이는 게 타오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챙겨서 여기에 좀 맡겨두어도 되죠? 2시 기차여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요."

"그럼요. 12시 40분에 툭툭이 불러놓을게요. 기차역까지 10분 조금 더 걸리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나는 방으로 올라가서 꼼꼼히 짐을 챙기고 아쉬운 마음에 베란다로 나갔다. 오는 첫날 반했던 풍경은 변함없이 환한 햇살 아래에서 멋스러웠다. 다시 여길 온다면 똑같은 방에서 하루 쉬어가는 것도 멋진 일이 되겠지.

숙소를 나와서 어제 봐두었던 미용실에 들렀다. 미용실이라기보다 샴푸실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를 감겨준다는 서비스가 있길래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멀뚱히 쳐다보길래 머리를 감는 시늉을 하니 웃으며 낡고 해진 의자로 안내했다. 의자에 누워 머리를 뒤로 젖히니, 곧이어 시원한 물이 머리를 적시고 여자가 조심스럽게 거품을 내었다. 별다른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겨주고, 마사지는 잠깐 시늉만 내고 끝이 났다. 머리를 말려주는 모양새는 영 어설퍼 보여 내가 드라이기를 달라는 시늉을 하니 수줍게 웃으며 드라이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개운한 기분으로 나와서 바로 근처에 있는 커피숖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창가에 앉았다.

여행을 하는 사이사이에 생기는 틈은 일상에서 겪는 틈과 또 다른 느낌이 있다. 그 틈이 여행과 여행을 이어주고 그 짧은 시간들이 모여서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진다.

비엔티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큰 배낭을 짊어진 백인들이 빨갛게 익은 어깨를 드러내고 뜨거운 햇볕아래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교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 여행객을 가득 태우고 지나가는 툭툭이들,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제법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정겨운 풍경들이 창밖으로 펼쳐졌다.

떠난다는 것은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방비엥 역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짐 검사를 철저히 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스캔이 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역무원에게 작은 다용도칼을 반납하고서야 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허술해 보이는데 어떻게 기차역에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검사를 하는 것인지. 

의자에 앉아 역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주위의 사람들을 그리고 있으니, 옆에 앉아 책을 보던 백인 남자가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왔다.

"와우!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그릴 수 있죠?"

"고마워요. 하하."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에서요. 당신은요?"

"아 한국! 알아요. 우리는 스위스에서 왔어요."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남자가 말하자, 여자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미소를 보여주었다.

"방비엥 여행은 어땠나요?"

내가 여자의 미소에 같은 미소로 답하며 물었다.

"아주 좋았어요. 더운 것 말고는 다 좋았어요. 더위는 정말 힘들긴 하네요. 하하"

"그렇죠. 저도 아주 좋았어요. 당신들도 루앙프라방으로 가나요?"

"네, 당신도?"

"네, 원래 갈지 말지 정하지 않았는데, 비엔티안에서 만난 택시 기사가 루앙프라방을 꼭 가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더라고요. 하하."

"그렇군요. 거기도 아주 좋을 것 같아 기대가 커요."

"네. 그럴 거예요. 이제 탑승해야 하네요. 여하튼 만나서 반가웠어요. 좋은 여행 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는 개찰구 입구로 갔다. 과연 제시간에 올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객실에는 사람들이 다 들어찼고 많은 짐들로 인해 복잡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갓난아기가 울기 시작해서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기차 안의 사람들 중 누구도 짜증내거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으니 어느새 기차는 루앙프라방역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차로 6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는데, 1시간 만에 도착하니 나 같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훨씬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루앙프라방 기차역에 도착하고 보니 방비엥 기차역과 흡사한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났다. 역을 빠져나오자 대기하고 있는 밴과 툭툭이, 여행객들로 인해 복잡했다. 툭툭이에 앉아 덜컹거리며 완전한 시골길을 30여분을 달려 루앙프라방 여행자 거리에 들어섰다. 

아! 비엔티안이나 방비엥과 사뭇 다른 모습에 나는 금세 설레는 기분이었다. 툭툭이 기사가 내려준 곳에서 아기자기하게 수놓은 듯한 골목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의 간판이 보였다. 마당에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이 열을 맞춰 놓여있고 그 위로 드리운 차양막이 그늘을 만들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입구에서 기념으로 전에 없이 셀카를 한 장 찍고 들어가니 게스트 하우스의 여주인이 전형적인 동남아식 영어와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방은 낡았지만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간단한 짐정리를 한 후에 밖으로 나와서 운치 있는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집집마다 높고 낮은 식물들이 어우러져 있고 게스트 하우스가 즐비했다. 그리고 변함없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한번 쓱 보고는 미련도 없이 사라지는 고양이들. 누군가 이 세계의 주인은 고양이라고 말하던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닐까.

두서없이 걷다가 골목을 빠져나오자 메콩강이 펼쳐졌다. 비엔티안에서 보던 강의 모습과는 다른, 좀 더 깊고 유연한 모습의 강이라고 할까. 하기야 광범위하게 나라와 나라에 걸쳐있는 메콩강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본 강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강을 따라 식당과 게스트 하우스, 오래된 집들이 줄을 서듯 이어졌다. 강이 한눈에 보이는 식당에서는 야외 테이블에 앉은 서양인 몇몇이 맥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잘 기억해 두었다가 해가 지면 나도 저기에 앉아서 맥주를 마셔야지. 그럼.

강을 따라 소박하고 멋스러운 이곳의 풍경에 취해 한참을 걷다 보니 다시 여행자 거리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그러니까 나는 강을 끼고 둥근원을 그리듯 걸었고, 원래 출발했던 곳으로 나도 모르게 왔던 것이다. 그럼 이제 좀 쉬었다가 원안을 구경하면 되겠군.

이곳 여행자 거리에서 어떤 이정표쯤으로 여겨지고 커피맛도 비교적 훌륭하다고 익히 들어왔던 조마 커피숍에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여행지에서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당연한 듯 주위를 관찰한다. 루앙프라방의 밤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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