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비엥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스쿠터를 타고 이곳을 천천히 다니며 구경하고 싶었다. 숙소 근처 가게에서 스쿠터를 대여하고 메콩강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느리게 다가오는 풍경은 스냅사진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강변 어느 곳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스쿠터를 세워놓고 가만히 앉아 쉬기도 하고, 흐르는 강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커피를 마시며 턱을 괴고 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어있는 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이 유유히 흐르는 메콩강.
천천히 쉬어가며 메콩강변을 두 바퀴를 돌고 강이 한눈에 보이는 식당에 앉아 족발덮밥과 비어라오를 한병 시켜 느리게 식사를 했다.
말동무가 없어도 강풍경을 벗 삼아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 외롭지만 황홀한 오후였다.
식사를 마치고 여행자거리로 들어와서 다시 천천히 달리다 보니 낮은 담벼락 넘어 초등학교가 보였다. 운동장에서 까르르 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담 너머로 보다가 교문을 통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빨간 스카프를 매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 경계도 없이 해맑게 웃으며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을 배경으로 셀카를 촬영하니 손하트를 그리며 아이들은 맑은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는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이라고 알아? 아저씨는 까올리야. 아! 알아요. 까올리! K팝!
초롱초롱한 눈으로 음악을 흥얼거리며 춤을 추는 아이들 얼굴 위로 지난밤 야시장에서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너희들도 더 발전되고 부강한 나라에서 살게 되길. 밝고 건강하게 자라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조금 더 달리다가 사원이 보여 멈추었다. 이곳에서 사원은 너무 흔한 곳이어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어쩌다 우연히 들어간 사원을 거닐며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한다.
사원을 다 둘러본 후에야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왓씨엥통 -황금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이라는 이 사원은 루앙프라방의 대표적인 사원이었다. 목조건물들은 아름다운 장식들로 잘 꾸며져 있었고 단정한 정원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잘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수십여 명의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견학을 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주황색 승복을 입은, 일부 노쇠한 스님들은 벤치에 앉아 뜨거운 날씨에 힘겨워했다. 평생을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 신념이라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사원의 안과 밖을 천천히 구경하다가 한쪽에 꾸며진 작은 정원 쪽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있으니, 여자 경찰이 자신이 앉아있는 근처의 그늘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고마워요. 혹시 근무하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서..."
내 말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여자 경찰과 함께 있던 남자 경찰이 유창한 영어로 어디에서 왔냐며 내게 물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당신들은 여기에서 근무하는 건가요?"
"네, 혼자 여행 왔어요?"
"하하, 혼자예요. 루앙프라방에 완전히 반했어요."
두 사람은 내 말에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 경찰은 작은 얼굴에 코가 오뚝하고, 맑고 깊은 눈매의 보기 드문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덥지 않아요? 한국은 지금 날씨가 어떤가요?"
"아, 덥네요. 한국은 지금 겨울이어서 추운데 곧 봄이 올 거예요. 근데 한국의 여름은 정말 더워요. 특히 내가 사는 곳은 여름이면 지독한 더위로 유명한 지역이에요. 아마 지금 여기 날씨보다 더 뜨거울 거예요."
"정말요?
여자 경찰이 다소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한국말로 싸바이디는 뭐라고 하나요?"
"안녕하세요?"
내가 두 손을 모아 가볍게 목례를 하며 대답하니 발음을 곧잘 흉내 내며 두 사람이 따라 했다.
가이드로 보이는 까만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서 경찰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서로 구면인 듯, 유쾌하게 웃으며 라오스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가이드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혀보겠다며 장난스러운 제스처로 농을 건넸다. 날씨와 언어, 음식 같은 의례적인 대화들이 또 오갔고, 가이드는 중간중간 라오스말로 경찰들에게 말을 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근데 당신 정말 미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여자 경찰을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 경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가이드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이를 묻는 내 질문에, 23살이라고 대답하며 여자 경찰이 수줍게 웃었다. 가이드가 내 나이를 묻고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다시 엄지를 치켜세웠다.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며 가이드가 떠나고 여자 경찰이 내게 푸시산을 가보라며 추천해 주었다.
"그곳에서 일몰을 볼 수 있다면 멋질 거예요."
“그래요, 그럴게요."
당신과 함께라면 더 멋지겠죠. 아! 나는 왜 이렇게 일찍 태어난 것일까.
"더운데 음료수라도 사가지고 올게요. 잠깐 기다려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괜찮다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사원의 뒷문으로 나가니 조그마한 매점이 있었다. 가짓수도 별로 없는 냉장고에서 레몬주스를 사서 건네자 내가 가르쳐준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라며 여자경찰이 말했다.
"건강하게 지내세요."
"당신도요.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퇴근 준비를 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원을 나왔다.
푸시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고 많이 높지는 않았지만 더운 날씨로 인해 숨이 찼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왔는데도 정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한쪽 난간으로 가니 루앙프라방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양옆으로 짙은 녹색의 나무들 사이로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낮은 집들과 사원들,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 해가 지면 저 길을 따라 야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또 불빛을 따라 모여들 것이다.
반대편 난간으로 가니 메콩강이 한눈에 보이고 멀리 산 넘어 하늘은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계단과 의자, 빈 공터에 앉거나 서서 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어떤 경건함을 갖게 한다. 당연히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런 경건함이 담겨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사람들은 조금씩 하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자리가 생긴 난간에 조금 더 다가가 짙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메콩강을 따라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메콩강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하기 위해 돌아서니 계단에 앉은 여자가 눈물 젖은 얼굴로 폰을 든 채 중국말로 울먹이며 통화를 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굵은 눈물방울이 얼굴에 그대로 흐르는 채로 통화를 하다가 목이 매이는지 서럽게 울며 강을 바라보았다.
어여쁜 아가씨. 나쁜 남자는 잊어버려요. 메콩강이 잠시나마 당신을 위로해 줄 거예요.
야시장으로 가서 스쿠터를 주차하고 식당가로 가니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했다. 어제 보았던 큰 물고기의 맛이 궁금해서 찹쌀밥과 함께 주문하고 식사가 곧 끝날 것 같아 보이는 테이블 주변에 가서 기다렸다.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곧 식사를 마친 서양인 커플은 가볍게 내 등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의 소년이 물고기와 찹쌀밥을 가져다주었다. 테이블에 놓고 보니 물고기는 아까 주문할 때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아! 이 커다란 물고기를 다 먹을 수 있을까. 소년에게 비어라오 한 병을 사달라는 부탁을 하니 흔쾌히 사다 주었다. 팁을 건네주자 소년은 미소 띤 얼굴로 공손히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며 빠른 걸음으로 가게로 돌아갔다.
포크와 숟가락으로 잘 튀겨진 물고기를 한점 떼어 맛을 보니 임연수어와 비슷한 맛이 났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소스에 찍어 찹쌀밥과 함께 먹으니 제법 괜찮았다. 무엇보다 비어라오가 있지 않은가.
갑자기 이름도 모르는 큰 물고기를 이 큰 야시장에서 혼자 먹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주위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서양인들은 내가 먹고 있는 큰 물고기가 신기했는지 대화도중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했는지 한 백인 여자가 물고기의 가격과 맛을 물어보았다. 내 대답을 듣고는 다시 자기 테이블의 사람들과 프랑스말로 대화를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내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해 보였다.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저토록 끊임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일까. 혹시 또 다른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내게 질문을 한 것은 아닐까. 그나저나 내 물고기라니. 하핫!
식사를 마치고 어둠이 내려앉은 루앙프라방의 중심을 조금 벗어나 스쿠터로 천천히 달렸다. 거리는 한산했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 기분은 상쾌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덩치만 크고 순한 개들은 스쿠터가 지나가자 낮은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설금설금 피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환한 조명들이 밝혀진 곳에 빼곡히 오토바이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간판을 보니 클럽인 것 같았다. 나도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고 수많은 전구들이 반짝이는 입구를 통해 들어갔다. 음침한 통로 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자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별다른 제재 없이 클럽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클럽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매캐한 연기와 음악소리, 눈부신 조명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다. 입구바로 앞 빈테이블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손을 드니 아직 어려 보이는 웨이터가 와서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비어라오 두병과 얼음을 시키고 찬찬히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앳되어 보이는 남녀들이 음악에 맞춰 무표정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는 너무 커서 박자에 맞춰 내 심장이 덩달아 쿵쾅거렸다. 군데군데 풍선을 들이마시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마도 일종의 가벼운 환각제처럼 보였다. 매캐하고 어지러워 들어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맥주 한 병만 마시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클럽 마당에는 오토바이들이 속속 더 들어오며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 눈부시도록 가난한 나라에서 저 어린 청춘들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숙소에 도착해서 스쿠터를 주차해 놓고 아쉬운 마음에 골목으로 나가보았다. 메콩강 쪽으로 걸어 나가 지난밤 들렀던 가게에서 비어라오를 한병 주문하고 강을 바라보았다. 메콩강아, 여전히 말이 없구나.
점원은 맥주를 가져다주며 웃어주었다. 아마도 또 왔군요라는 뜻의 미소인 것 같았다. 맥주 한 병을 시켜도 아무런 불만도 없이 친절하게 맞아주는 이곳이 라오스, 그리고 루앙프라방이다.
한쪽 테이블에는 지난밤 혼자서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백인 남자가,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관심사를 묻고, 내일 일정에 대해 서로 묻는 걸로 봐서 이곳에서 만나 친구가 된 것 같아 보였다. 마음을 열어놓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을 따라 숙소로 들어오다 보니, 유독 식물이 예쁘게 자란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서양인 게이 두 명이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당신들은 지금 행복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