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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Apr 14. 2024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 있나

 며칠 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여전히 인터넷과 TV에서 핫이슈다. 나에게도 이번 선거는 결과를 떠나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난생처음 투표사무원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능감독은 여러 차례 해봤지만 투표사무원은 처음이었으므로 긴장이 되어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선거전날 저녁, 카톡이 울렸다. 아침 6시부터 투표가 시작되므로 투표사무원은 5시까지 출근하라는 문자였다.


 새벽 4시 50분, 밖은 고요했고 아직은 깜깜한 밤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있었다. 하루종일 함께 일하게 될 투표사무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선서까지 하고 나서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사무원의 업무는 단순한 편이다. 일단, 투표사무원 1이 신분증 사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한다. 그거면 투표사무원 2가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다. 투표 인원을 헤아릴 수 있도록 투표용지 오른쪽 끝에는 숫자로 된 꼬리표가 붙어 있는데 이 꼬리표는 일일이 손으로 잘라내야 했다. 이것 역시 투표 사무원 2의 일이다.

 나는 투표사무원 2였다. 도장을 찍고 꼬리표를 잘라 떼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


# 천태만상 : 내 말이 맞아 유형

 순조롭게 진행되던 투표는 어느덧 아침 7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오셨다.

"도장을 왜 미리 찍어두는 거야? 이거 부정선거 아니야?" 라며 큰소리를 치셨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규정상 100장은 도장을 먼저 찍어두어도 괜찮은 거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할아버지는 본인의 판단을 았다.  

 잠시뒤 들어온 또 다른 중년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투표하려고 하노이에서 돌아왔어요. 나 같은 사람 없을 거야."

칭찬을 해달라는 건가? 잠시 고민을 한 뒤 "정말 잘하셨네요."하고 밝게 웃었다. 칭찬받고 싶은 이가 있다면 칭찬해 주는 것도 배려다. 내 기분도 절로 좋아졌으니 일석이조였다.


# 천태만상 : 네 말이 맞아 유형

 아침 9시쯤, 70세 전후의 사이좋은(?) 부부가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선거 기표대도 같이 들어가시려고 했다.

"각자 들어가셔야 해요." 다급하게 알려드리고 나니 이번엔 할머니가 큰 소리로 물으셨다.

"여보, 누구 찍으라고요?"

"여기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잠시뒤에 또 한 명의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나 우리 아들한테 전화 좀 하면 안 돼요? 누구 찍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어머니, 이 안에서 통화는 힘드세요.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과 당에 기표하시면 됩니다."

투표하는 것도 같은 곳에 해야 하는 사이좋은(?) 가족이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려와 위로는 함께하는 것이 좋지만 때론 독립적이어야 하는 순간도 있음을 잊지 말자.


 # 천태만상 : 말이 짧은 유형

오전 10가 지나가자 투표하는 사람을 더욱 늘어났다.

"투표용지는 2장입니다."

"뭐라고? 들리게 말해. 그리고 뭐가 이렇게 많아?"

비례대표 정당이 많은 걸 보고 하는 말이었겠지만 낯선 이에게 '야, 너'를 듣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분이 조금만 생각하셨더라면 휴일에 아이들을 두고 나와 새벽부터 일하고 있는 내가 누군가가 해야 할 일(바로 당신!)을 대신하고 있는 감사한 사람임을 눈치챘을 텐데. 그분은 눈치가 없다. 배려도 없었다.


#천태만상 :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유형

고등학생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사람이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투표용지는 2장입니다."

"감사합니다." 투표용지를 소중하게 받아 든 그녀는 꾸뻑 인사를 하고 기표로 향했다. 그녀 덕분에 오전 내 상처받았던 마음이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사람이었다. 어린 그녀가 살아갈 세상이 따뜻함으로 가득하길 기도했다.


# 천태만상 : 기념일을 부탁해 유형

오후에는 고등학생정도 되는 아들과 엄마가 함께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아들의 표 선거인 명부를 확인하던 그때, 엄마가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아휴~ 우리 애가 이번에 첫 선거거든요. 기념으로 사진 한 장 남기려고 하는데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안됩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 사진 삭제 부탁드려요."

냉정하게 보일지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나의 신념이므로. 그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아들이 꼭 알아차려줬으면 좋겠다.


# 천태만상 : 함께 해요 유형

 휠체어 탄 노모와 60대의 아들, 딸이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인지기능이 떨어지셨는지 기표안에서 한참을 계셨다. 아들, 딸은 그런 노모를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빛은 오래전 노모가 그 아들, 딸에게 보냈을 그것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태만상 : 평생 함께해 유형

 한눈에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 보이는 딸의 손을 꼭 잡고 70대의 노모가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노모는 4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딸의 손을 마치 5살짜리 손을 잡듯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들이 손을 놓았던 순간은 기표에 들어가는 순간뿐이었다. 맞잡은 모녀의 두 손을 아주아주 오랫동안 놓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오후 6시, 투표가 종료되었다. 내가 찍은 도장은 총 1982개였고 자른 꼬리표의 개수도 1982개였다. 가위 손잡이가 닿는 부분의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나를 스쳐간 1982명의 인연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 그러니 내가 조금 낫다는 이유로 타인을 무시한다거나 조금 부족하다는 이유로 위축되지 말자. 우린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다.

출처 : Pixabay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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