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바라본다.
오늘 하루도 작은 파도가 이어졌다.
아침엔 이웃이 개 때문에 화를 냈고, 회사에서는 상사가 내 자료를 꼬치꼬치 따졌다. 집에서는 아이가 학교에서 물건을 던졌다는 연락이 왔다.
예전 같으면 나도 함께 휘말려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았다.
"이건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화를 낼까? 그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니, 상황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분노를 쏟아내지 않았고,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결국 감정을 잃은 쪽은 내가 아니라 상대였다.
보호자로 살아간다는 건, 늘 누군가의 고통 옆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 고통이 내 것이 아님에도, 나는 매일같이 흔들리고 지쳐간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그의 고통과 나의 감정을 분리해 바라보는 일, 내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살피는 일.
이건 무심해지려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호흡이다.
숨 고르기를 할 때마다, 나는 보호자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다시 선다.
예전에 암 환자였던 한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암이 재발했을 때, 누나가 매주 복숭아를 사들고 와서 잠시 안부만 묻다 가던 일이 참 좋았다고 했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그 조용한 방문이 삶의 활력이 되었다고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간호하거나 문병을 가는 일은 단순히 그들의 무력감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곁을 직접 찾아가 눈을 마주하고, 그의 존재가 여전히 소중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렇게 삶에 작은 활력이, 작은 불씨가 불어넣어 질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돌봄과 간호는 결국 그에게 "당신은 여전히 소중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간호하고 지켜보는 이유는, 단지 그를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삶을 조금 더 빛나게 해 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삶은 언제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관찰자가 될 때, 우리는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붙잡을 수 있다.
억지로라도 웃어도 좋다.
웃는 그 순간, 우리 뇌는 신호를 보낸다.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오늘 하루, 나는 내 안의 작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냈다.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같은 파도가 오겠지만 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나를 다시 세울 것이다.
보호자로 산다는 건, 타인의 고통 옆에 서 있으면서도 내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작은 불씨 하나가, 결국 나와 그를 함께 살게 한다.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는 그 상황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