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차 엄마인 나, 오늘도 버티며 나는 달린다
아이 학교에서는 늘 안내 사항, 정보 제공, 행사가 있을 때마다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오늘도 학교에서 알람이 왔다.
11월 13일(목)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로 중학교는 재량휴업일입니다. 학생들이 가정에서 건강하게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지도 부탁드립니다.
스마트폰 문자 화면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 11월 13일이 바로 수능일이구나.'
솔직히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가 아니면 놓치기 쉬운 날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날 만큼은 수험생 가족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함께 두근거리며 누군가의 합격을, 누군가의 노력을 응원하는 날이 아닌가 싶다. 하늘 길의 비행기조차 잠시 멈춰 서고 전국이 조용해지는 그 시간. 수능은 단 한 사람의 시험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함께 치르는 날이다. 요즘 나는 수험생 엄마들에게 유독 존경심이 든다.
나는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일했다.
"와, 정말 대단하세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긴 시간 버텨온 노력에 대한 예의이자 격려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문득 생각한다. 수험생 엄마들의 20년은 그 어떤 경력보다도 치열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20년 차 엄마가 아니다. 올해 중학교 1학년, 열네 살 아이의 엄마다. 그러니까 14년 차 엄마다. 아직은 수험생 엄마의 세계를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이 험난한 사춘기 코스를 지나며 그 길이 얼마나 길고 고된 마라톤일지를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때도 참 많은 '코스'가 있었다. 엄마가 일하느라 바쁘던 시기, 맡길 곳이 없어 아등바등 뛰어다니던 시간. 초등학교 시절, 공부 습관을 잡아주기 위해 함께 애쓰던 나날들. 그 시기에도 매일이 마라톤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사춘기 코스에 진입했다. 요즘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전쟁터다. 방문을 쾅 닫고, 소리를 지르고, 어느 날은 "공부 안 해!" 하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화를 꾹 눌러보지만, 결국 나도 터진다. 그러면 아이는 집을 나가고,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이 시기를 어떻게 건너가야 하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고비 같고 모든 순간이 시험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의 수험생 가족들도 분명 이런 과정을 지나왔을 것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 사춘기의 폭풍을 견디고, 이제는 수능이라는 코스를 향해 달리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겹친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곡선을 돌아온 인내의 베테랑들이다. 서로 부딪히고, 달래고, 포기하고 싶던 날을 견디며 마침내 이 긴 마라톤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험생 엄마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든다. 그들은 마치 마라톤 경기의 페이스메이커 같다. 페이스메이커란 경기에서 선수들이 목표 속도를 잃지 않도록 일정한 리듬으로 함께 달려주는 조력자를 말한다. 완주를 위해 스스로의 숨을 조절하며 옆에서 같이 달려주는 존재, 바로 그 역할이 수험생 부모가 아닐까. 아이의 페이스를 읽고, 숨 고르는 타이밍을 알려주는 사람. 누구보다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헌신적인 동반자다.
그리고 그 코스의 끝에는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고등 시기, 진짜 전력 질주의 시간이다. 선배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시기는 그야말로 '집 전체가 아이의 눈치를 보는 시기'라고 한다. 행여나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TV조차 켜지 못하고, 밥상 위엔 늘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이 오른다. 대화도 발소리도 심지어 숨소리조차 줄이며 살아가는 시기. 그렇게 집안 전체가 '수험생 모드'로 전환된다.
13일엔 교문 앞에서 기도하듯 손을 모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부모다. 교문 앞에서 조용히 "괜찮아,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 목소리, 새벽에 불 켜진 부엌에서 도시락을 싸는 손,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아직 나는 그 시기를 겪지 않았지만 그날이 언젠가 내 앞에도 다가올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렌다. 이 험난한 마라톤의 다음 코스에 대비해 나는 지금 나름의 페이스를 조절 중이다.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엄마로서의 체력과 마음 근육을 단련하고 있다.
지금은 사춘기 구간을 달리고 있는 내 아이. 언젠가 그 아이도 고등 시기의 결승선을 향해 전력 질주 할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오늘의 나처럼 또 다른 엄마가 뒤에서 조용히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의 혼란스러운 시간도 조금은 견딜만 하다. 사춘기도 언젠가 끝나고, 그 끝에는 새로운 출발선이 있다.
수능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풀코스 마라톤 같다.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고, 한 구간이라도 허투루 뛸 수 없는 긴 여정이다.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도 함께 달려야 완주할 수 있는 경기.
나는 방송작가로서 20년 동안 수많은 원고를 써 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긴 원고, 가장 치열한 스토리는 바로 '부모로서 써 내려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올해 수능을 앞둔 모든 부모들께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매일의 불안과 싸우며 아이의 꿈을 함께 지켜온 인생의 베테랑들이다. 이제 그 긴 마라톤의 마지막 구간, 결승선이 눈 앞이다. 2027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맞이하는 모든 수험생과 가족들, 끝까지 힘내시길. 오늘은 스마트폰 속 SNS에 '수험생 가족 파이팅!'이라는 글을 남겨본다.
그리고 오늘도 사춘기 코스를 달리고 있는 나 같은 부모들에게도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
"우리도 잘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그날까지, 우리의 마라톤은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