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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의 하룻밤, 아이의 새로운 추억

'어린이 사서' 프로그램을 만나다

지난 11월 15일,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열린 '어린이 사서' 프로그램 수료식에 앉아 있던 나는 여러 번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반년 넘게 이어진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직업 체험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던 내 아이를 도서관으로 이끌어준 아주 작은 출발점 같은 시간이었다. 그 출발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엄마의 마음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다. 책이라면 교과서 정도만 겨우 보는 아이,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영상만 찾아보는 아이. 그러던 어느 날,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어린이 사서 프로그램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이사서를 시작하다


"이거 신청하면 경쟁률이 치열해서 떨어질 수도 있어. 근데 만약 붙으면 꼭 참여하는 거, 약속할 수 있어?"


나는 아이가 혹시라도 나중에 '안 다니겠다'고 뒤집지 않도록 먼저 약속부터 받아냈다. 아이의 대답은 담담했다.


"좋아.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그 말 속에는 기대도 의지도 없었다. 그냥 '어차피 떨어질테니 대답해 주는' 가벼운 마음. 하지만 나는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이건 분명히 붙을 거야.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이 이름은 참가자 명단에 또렷하게 올라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이 해 버린 그 약속 때문에 어린 이사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은 지난 5월 3일에 시작해 11월 15일에 끝났다. 매달 첫째, 셋째 주 토요일, 아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약 반년 넘게 이어졌다. 그 내용은 단순히 사서라는 직업을 가볍게 체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책을 고르는 법부터 독후 활동을 놀이처럼 풀어내는 방법, 인근 도서관 탐방, 그리고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도서관 1박'행사까지 책과 도서관을 몸으로 익히는 경험을 했다.


IE003549312_STD.jpg '어린이사서' 프로그램 수료식 현장에서


수료식 스크린에 띄워진 사진과 영상 속에는 반년 동안 아이들이 겪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사진을 바라보다 보니 그 시간 사이에 끼어 있던 아이의 결석들도 떠올랐다.


어떤 날은 감기 때문에 늦잠을 잤다. 어떤 날은 감기가 이어지다 보니 연속 결석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단순한 늦잠 때문이었다. 결석이 이어졌던 시기, 나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특히 인형극 발표 시간.


무대 위에서 다른 아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인형극을 부모 앞에서 완성도 있게 선보일 때, 우리 아이는 혼자만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 조용한 뒷모습이 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조금만 더 깨워서 데려올 걸.'


'조금만 더 챙겨줄 걸.'


엄마의 아쉬움은 늘 그렇게 뒤따라온다. 그날의 아이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눈빛에는 '좀 더 성실히 참여할 걸…'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수많은 활동 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빛나던 순간은 도서관 하룻밤 자기 행사였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날,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도서관에서 하룻밤 자본 적 없지?"


그 질문 하나에 아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 느껴졌다. 도서관에서 직접 요리도 해 먹고, 퀴즈 풀기 이벤트도 하고, 영화도 보고, 숨바꼭질도 하고, 손전등을 들고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도서관을 '밤의 놀이터'로 바꿔냈다. 낮에는 조용히 책장만 보이던 도서관이 밤에는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가 되었다.


특히 나는 아이가 책 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었다. 그날 아이의 꿈속에서 스마트폰은 잠시 '빠이빠이' 하고 책이 조금은 마음속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조금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료식에서 받은 어린이 사서 작품집을 펼쳐봤다. 아이의 사진과 그동안의 활동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간단한 질문과 답이 적혀 있었다.


"도서관에 와서 기분이 어때?"
"좋아. 놀아서."

"내가 생각하는 도서관은?"
"게임하는 곳."


순간 웃음이 나왔다. 책과 인사 시키려 반년을 보내도 아이의 마음속 도서관은 여전히 '무료 와이파이 터지는 재미난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이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아이의 발걸음이 반년 동안 꾸준히 도서관으로 향했다는 것, 책 사이에서 잠든 그 밤의 시간, 함께 땀 흘리며 활동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경험이 아이 안에 아주 작은 길 하나를 만들어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들


스마트폰 세대 아이에게 책을 가장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개한 시간.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놀 수 있는 곳'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는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놀이터도 습관이 되면 자꾸 가는 것처럼, 도서관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으니까.


IE003549326_STD.jpg '어린이사서'프로그램을 마치며


드디어 어린이 사서 프로그램이 끝났다. 이제 토요일 아침마다 아이를 흔들어 깨우는 실랑이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스마트폰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나는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도서관에서 보낸 반년이 아이에게 아주 작은 흔들림이라도 남겼을 거라고. 누군가는 '겨우 그 정도?'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작은 변화는 아주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도서관 앞에서 기웃거린다.


"혹시 다음에도 아이가 참여하고 싶어 할까?"


"다음엔 조금 더 책과 가까워질까?"


그런 마음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이 없는지 또 찾아본다. 엄마라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강요보다는 '기회를 열어두는 것', 문을 열어두고 아이가 언젠가 스스로 그 문을 지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 문이 도서관의 문이든, 책의 문이든, 혹은 아이만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든 나는 언제나 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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