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나를 끝까지 응원해 준 사람들, 그리고 생존 작가 노트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은 늘 조용히 떨렸다.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출간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더 힘이 빠졌던 건, 처음에는 계약 이야기처럼 시작됐다가 메일을 자세히 읽어보면 자비 출판이거나, 작가가 출간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조건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실망감은 오히려 더 컸다.


열 곳, 스무 곳.


무응답과 거절이 반복되자 이쯤 되면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내가 과연 계속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이 물었다.


“엄마, 출판사 몇 군데나 보냈어?”

“그거 보내고서 이렇게 침묵하는 거야?”


그리고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다른 사람들 글 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아? 작가들도 글 쓰는 게 되게 힘들다고 하잖아. 근데 엄마는 뚝딱뚝딱 글을 빨리 쓰잖아. 그건 진짜 대단한 거야.”


나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응원은 출판사의 어떤 답장보다도 정확했고, 단단했다.

아들은 또 덧붙였다.


“동화책 출판사 진짜 많아.

도서관 가면 책 맨 뒤에 다 나오잖아.

거기서 출판사 조사해서 하나씩 보내면 되지.”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오히려 나에게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 반응 별로였던 거 알아? 아직 못 만났을 뿐이야.”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빨리 포기하려 했구나.’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투고 결과를 기다리지 말자. 투고를 보내고, 다음 작품을 쓰자.


투고는 보내고 시선은 다시 원고로 돌렸다. 그러자 기다림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다시 ‘쓰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이 말한 “엄마는 뚝딱뚝딱 쓴다”는 말에는 사실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혼자서 글을 쓰지 않았다. 나를 끝까지 버티게 해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생존 작가 노트,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트였다.


방송작가 시절, 나는 데일리 방송을 했다. 매일 아이템을 찾아야 했고, 매일 원고를 써야 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친구를 떠올리면 늘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아이템 하나를 겨우 찾고, 방송을 제작하고, 원고를 제출하면 끝이어야 할 텐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이템, 다음 날 원고가 머릿속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좀 쉬고 싶다.”

“나도 친구들이랑 맥주 마시며 워라벨을 즐기며 살고 싶다.”


하지만 데일리 방송은 그런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늘 불안했고, 늘 지끈지끈 머리를 잡고 살았다. 결국 그 친구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달랐다.

생존 작가 노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스크랩하던 아날로그 시절부터 기사 제목과 키워드를 적던 디지털 시대까지, 나는 늘 노트를 곁에 두었다. 기사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되었고, 영화에서 본 장면은 키워드가 되었고, 베스트셀러를 읽으며 떠오른 질문들은 다음 원고의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수다를 떨며 웃는 순간도 나에게는 모두 ‘일상’이자 ‘일’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노트에 적었다. 그 만남 자체가 아이템이 되었고, 워라벨이 되었고, 원고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일을 즐긴 사람이 아니라 일상이 일이 되도록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동문학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도 나는 다시 나만의 생존 작가 노트를 만들었다. 아이들과 지내며 들은 말, 순간 반짝였던 상상력, “이건 이야기로 되겠다” 싶은 주제들, 장면의 뼈대들을 조각조각 기록해두었다. 완성된 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은 나중에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이미 노트 한쪽에 담긴 기록들이 “어서 나를 써달라”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거절당할 수 있고,

맞지 않을 수 있고,

아무 소식 없이 시간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건 포기가 아니라 저축이다.


생존 노트에 기록해둔 일상과 생각들, 그 조각들을 하나씩 저축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리고, 어느 순간 출판사와 맺어지는 시간이 온다.


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보다도 응원군이다.

사람의 응원,

그리고 노트의 응원.

나는 그 두 가지 덕분에 오늘도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고 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2화나를 알아볼 단 한 사람을 찾는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