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 - 연출가 박혜선
2019년 국립극단의 첫 공연, <자기 앞의 생>이 지난 2월 22일부터 3월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됐다. 특히 로자 역에 스크린과 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양희경 배우가 이수미 배우와 함께 더블 캐스팅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는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펴낸 두 번째 책이며, 같은 작가한테 절대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가 되었다.
프랑스 빈민가의 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늙은 유대인 로자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랍인 아이 모모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로자는 홍등가를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오다가 나이가 들자 이제는 창녀의 아이를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로자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로자에게 아이를 맡기는 창녀가 줄어들고, 다들 성장해서 떠나가버려 이젠 모모만 남았다. 호기심 많은 10살 소년 모모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매일매일 새롭지만, 로자는 그런 모모가 걱정된다. 로자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 카츠 선생님이 힘겹게 7층 계단을 오르내리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모모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지고 모모의 친부인 유세프 카디르가 찾아온다. 모모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로자와 로자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모모의 마음이 통해 거짓말로 유세프 카디르를 돌려보낸다. 이제 로자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카츠 선생님은 로자에게 입원해야 한다고 통보한다. 그러나 그것이 로자가 원하는 삶의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 모모는, 로자가 자주 가던 지하실에서 로자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본다.
아쉽게도 양희경 배우가 연기하는 로자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수미 배우 역시 다수의 무대 경험을 증명이라도 하듯 또렷하면서도 확실한 발성, 그리고 정확한 감정 표현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로자가 과거 기억으로 인해 발작을 부리거나 치매 증상으로 인해 어린 모습을 보일 때조차 조금 차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은 오정택 배우의 모모였다. 오정택 배우가 10살 혹은 14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몸집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그 지점이 모모가 또래보다 일찍 삶을 깨닫고 모든 걸 알아버렸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한 캐스팅이었으나 공연을 보며 점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원조 배우의 카츠 선생님은 비중 있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등장할 때마다 잔잔한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특히 7층 계단을 올라와서 로자의 방으로 들어올 때의 연기는 정말 일품이었다.
김한 배우의 유세프 카디르는 가장 비중이 적으면서도 극을 가장 크게 흔들어놓는다. 전반적으로 큰 갈등이 없는 이야기에서 유세프 카디르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극적인 긴장감을 낳는다. 특히 이 배우가 <록앤롤>에서 페르디난드와 동일 인물인 배우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살짝 비어 보였다. 아무래도 넓은 무대를 로자와 모모 둘이서 다 채우려고 하다 보니 쓰이지 않는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또한 과거 영상을 벽에 비추는 것이 괜찮은 시도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의도한 만큼 충분한 효과를 내지는 못한 듯 보였다.
<자기 앞의 생>은 사랑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 없는 가족과 가족 없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유세프 카디르와 모모의 관계는 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세프 카디르는 모모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가계를 이어갈 아랍인 아들일 뿐이다. 이 관계는 법적으로는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 없는 가족이며 이는 더 이상 가족이라고 불릴 수 없다. 이에 반해 모모와 로자의 관계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모모와 로자는 서로의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공유한다. 모모는 로자의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불편함을, 로자는 모모의 불안한 신분과 미래를 떠안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서로는 법적으로 가족이 아닐지언정, 이미 충분히 가족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가족은 한 가정에 살며 피가 이어진 집단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세계의 많은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져 있고, 같은 종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기 앞의 생>은 다르게 말한다. 우리는 로자와 모모를 가족 이외의 관계로 묶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로자와 모모는 피가 이어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종교도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의 가족이다. 그들이 서로의 가족인 이유는 로자와 모모가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가족이란,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나누는 사람들이며, 혈연이나 종교 등 어떠한 것도 가족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흔히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사랑은 원래 피와 상관이 없다.
<자기 앞의 생>은 또한 그 제목에서 말하듯,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작의 영제는 The Life Before Us, 우리 앞에 놓인 삶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앞에 생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생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 늘리거나 끊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세계는 개인이 자기 앞에 놓인 생을 늘리고 싶어 하도록 만들어야지, 강제로 늘려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랑이란 내 앞에 놓인 생과 상대방 앞에 놓인 생을 둘이 함께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생을 늘리고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지켜볼 이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결국 박혜선 연출의 말대로, 사랑 없는, 사랑해 줄 누군가가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생각만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