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와 플랜이 필요해진 시점.
육아라는 숙제가 생겨났다.
사람을 키워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며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를 유추할 때 도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게 키워졌기 때문에 귀결된다. 부모가 그 사람 그렇게 키웠다. '센스 있게 키웠다. 똑똑하게 키웠다. 매력 있게 키웠다.'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좋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욕은 이거다. '본데없이 자랐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속 뜻을 들춰보면 절대 쓰면 안 되는 말이다. 자라면서 본 것이 없다는 뜻은 부모에게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로 나와 부모를 한 번에 욕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하면 부모도 욕을 먹는 것이고, 부모가 잘못 가르치면 자식까지 욕먹는, 가족 전체가 무시당하는 무서운 말인 것이다. 나는 좋든 싫든 한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인생을 밝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부모라는 둥지를 떠나 세상으로 날아오를 때까지 나는 무궁무진한 발전의 가능성을 품은 이 작은 생명을 튼튼하게 키워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어느 날 오후 시터 이모님과 육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모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부모가 자식을 자신이 키우고 싶은데로 키우려고 하면 안 돼요. 자식이 크고 싶은데로 크게 도와줘야지. 모든 불협화음이 거기에서 생겨요. 부모가 자기가 원하는걸 자식에게 투영한단 말이지. 그게 공부일 수도 있고 뭐 다양하죠. 근데 그건 부모 생각이지, 자식 생각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랬다. 나도 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키우고 싶은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의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엔 '부모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60일 전에 낳은 아이는 이제 제법 사람 같아졌다. 밤과 낮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먹지 않고도 5시간 정도 밤잠을 잔다.(처음 집에 왔을 땐 1시간에 한 번씩 깨어났다. 정말로.) 의사표현을 하는 표정도 다양해졌다. 소리 내서 웃는 걸 보니 감정이란 것도 생긴 것 같다. 당분간은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일은 여전히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겠지만 그 시간 또한 순식간에 지나갈 것 이란 예감이 든다. 분명 아이가 아장거리며 걷기 시작한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핸드폰 앨범을 들여다보며 '아, 우리 아기 이렇게 작고 예뻤네, 시간이 참 빠르다'하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이미 신생아 시절 사진을 보며 폭발적인 성장에 놀라긴 한다.)
과거의 나는 결혼을 하면 아기는 꼭 낳고 싶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로망이 있었다. 나를 닮은 아기가 궁금했다. 나에게 있어 결혼이란 건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했다. 처음으로 '이 사람을 닮은 아기를 낳아도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지금의 남편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일 같다. 우리는 양육에 대한 태도와 방향이 잘 맞았다. 서로 지향하는 것과 지양하는 것이 신기하리만큼 잘 맞았기에 양육이라는 큰 산을 정복하기에 앞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우선 좋은 지도를 잘 챙겨 나온 등산객이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2D로 펼쳐진 지도와 실제 등산은 다르다. 우리는 지도 속에 겹겹이 쌓이 등고선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아니 존재는 알고 있으나 겪지 않았기에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른다. 수많은 언덕과 봉우리를 넘어가며 정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숨을 헉헉 거리게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는 아기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고, 공부에 얽매이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그럼에도 좋은 학군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게 해주고 싶었고, 10살 전후로 어학연수 정도는 보낼 생각이었다. 예체능에 재능만 있다면 적극 지원해줄 생각이었고, 운동선수나 싱어송라이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지극히 부모의 생각이었다. 아이가 어떻게 크고 싶은지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생각에는 바람과 욕심이 적절하게 섞여있었다. 과연 그 계획은 누구를 위함이었을까? 그렇게 경종이 울려 퍼지던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작은 아기는 이제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물체인지 구분하는 것 같다.(사람이 놀아주면 리액션이 끝내준다.) 그런 아이의 양육을 위해 벌써 플랜을 세워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플랜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기의 연령별 놀이, 교육을 포함해서 대략적인 마스터플랜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모든 부모가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길을 헤매는 등산로에 이정표가 꽂혀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육아라는 산을 정복하며 수없이 자주 마주하게 될 혼돈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을 이정표가 필요하다.
오늘부터 숙제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내 아이를 위한 마스터플랜. 그건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