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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옭아매는 일

나는 과연 착한 사람일까?

by 이호은

몇 년 전 어느 날, 차 사고가 났다. 신호대기 중이었는데 뒤에 오던 차가 우리 차를 박았다. 우리 차에는 친정 부모님과 두 돌도 안 된 어린 아들까지 네 명이 타고 있었다. 뒤차가 부딪칠 때 너무 큰 소리가 났기 때문에 나는 정말 차가 폭발한 줄 알았다.


가뜩이나 좋아하지도 않는 운전을 억지로 하고 있는데 사고까지 나니 순간 짜증이 밀려오면서 신경질이 났다. 뒤차 운전자는 중년 아주머니였는데 한눈을 팔았다고 미안해했지만 나는 이미 크게 놀랐기 때문에 아주머니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사고를 마무리하고 다시 차에 탄 순간, 아빠는 내게 “별 큰일도 아닌데 왜 난리냐”며 당신 같으면 연락처도 안 받고 보냈을 거라고 도리어 피해자인 나를 탓했다.


실제로 큰 사고는 아니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범퍼에 흠집은 났지만 수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뒤차 아주머니 보다 위로와 걱정은커녕 대인배인 양 구는 아빠가 더 미웠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나는 항상 착한 아이여야만 했다. 아빠 앞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티를 내지 못했다. 언짢은 기색을 조금이라도 비치거나, 불평이라도 했다간 무차별적인 화살이 날아 왔다. 화살은 주로 아빠의 입에서 나왔지만, 아빠가 정말 화가 났을 땐 매로 변하기도 했다.


어릴 때 라면이 매워서 칭얼거릴 때도, 놀이공원에서 기념품을 사달라고 조를 때도, 아빠와의 약속 시간에 늦어서 서로 엇갈렸을 때도 늘 혼이 났다. 나는 그저 매운 라면 말고 다른 게 먹고 싶었고, 기념품이 예뻐서 갖고 싶었을 뿐이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실수였는데도 말이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변명을 하면 더 혼났기 때문에 아무리 억울해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마음속에서 팝콘처럼 펑펑 튀어 오르는 말들을 억지로 눌러 담으며 아빠의 화가 잦아들기를 바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빠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은이는 착해.”라고 하는 게 싫었다. 아빠 딴에는 칭찬으로 한 말이지만 내게는 “너는 착해야만 해.”라는 강요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집에서부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니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말을 해야 할 때는 으레 피하고 참았다. 나만 참으면 평화롭기 때문이고, 나는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두 번 볼 일 없는 사람과는 나만 참으면 됐지만, 특히 같이 사는 남편과 아들 앞에서는 유독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나는 평생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이럴까? 화냈다가 사과했다가, 또 화내고 사과하고……. 그런데 친정에만 가면 자동으로 내 안의 ‘착한 아이’가 나와 감정을 억누른다. 이 정도면 지킬 앤 하이드도 학을 뗄 것 같다.


사람은 여러 감정을 느낀다. 긍정적인 감정은 소화하기가 쉽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정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맑고 깨끗한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되지만, 오염수는 불순물이 완전히 걸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화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화내는 것’은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성격이 거칠고 괄괄한 사람만 하는 일인 줄 알았다. 부모에 의해 착하고 온순하고 순종적인 자아상이 덧입혀졌었기 때문에 감정의 추가 한쪽으로만 기울어져서 다른 쪽은 내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 단정짓고 죄악처럼 여겼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어떤 감정이든 수용 받고 다스리는 연습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 몸만 큰 성인이 되어 버렸다. 이걸 마흔이 넘어 바로 잡으려니 범퍼카처럼 우왕좌왕하는 꼴이 우습고 창피하다.




내가 착하고, 못되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착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그저 여러 감정을 느끼는, 살아있는 인간일 뿐이다. 착하다는 말에 얽매이지 않아야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쳐야 할 때도 급발진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옭아매는 문제를 명확히 알았으니, 이제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당당해지는 연습을 해야 할 차례다. 그게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성숙해지는 길이고, 내 아이에게 ‘착한 족쇄’를 물려주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나처럼 될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나는 나로서 완전하기에 남은 날들은 정말로 ‘나답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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