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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Aug 10. 2021

우울해도 행복할 수 있어

7. 우울과 행복, 불안과 행복의 공존

<이 글은 서울로 올라와서 혼자 우주를 떠도는 듯한 외로움을 겪은 다음 날 썼던 일기입니다. 단약을 한 게 아무 소용도 없어졌다는 생각에 많이 좌절했는데, 이 날부터 내 우울증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려고 많이 애를 썼어요. 해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하죠. 지나고 보니 이때가 저에게 가장 어두운 터널이었고, 아래 일기를 썼던 날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 마음의 변화가 잘 드러나는 글인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폭풍우가 치듯 출렁이던 마음은 잔잔해졌고, 머릿속을 잔뜩 채우고 있던 우울이란 안개도 조금 옅어졌다.


우리 집은 작은 산을 바로 뒤로 하고 있어서 거실 밖으로 보이는 전망이 정말 좋다.

이사를 오기 전엔 정신없이 회사를 다니다 보면 계절이 오고 가는 걸 느낄 새가 없었다.

출퇴근 인파 속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다 문득 버스 창밖을 보고 '어라, 언제 꽃이 이렇게 다 피었지?' 아니면 '언제 나무가 다 단풍이 들었지?' 하곤 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신혼집을 잡고 나서는 온전히 사계절을 느끼며 산다.

봄에는 나무의 새순이 반짝이며 흔들리고, 여름엔 개구리가 울며, 가을엔 하루하루 붉어지는 단풍을 즐길 수 있고, 겨울에 소복 눈이 내리는 날에는 산속 별장에 온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오늘도 늦은 아침을 먹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아- 하고 일제히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을 멍하니 감상했다. 숲 체험을 온 유치원 아이들의 노랫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새소리도 들린다. 이곳에 살면서 걱정 없이 마냥 밝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큰 위로를 준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들은 계산하지 않으며,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미루지도 않는다. 그냥 기쁘면 까르륵 웃고 슬프면 엉엉 운다. 이런 단순함이 삶에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자고 일어나면 전화를 주라는 엄마의 메시지를 보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우리 엄마는 자나 깨나 딸 걱정뿐이다. 엄마 자신도 많이 아프면서 내가 아침은 잘 먹었는지, 상태는 어떤지 매일매일 물어보고 운동을 해야 한다, 잘 먹어야 한다 이런 말을 매번 한다.


점심으론 내가 좋아하는 꼬막 비빔밥을 먹었다. 원래 양이 작은 데다 점점 식욕이 떨어져 한 끼에 밥 한 공기를 먹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잘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걱정이 마음에 쓰여 열심히 한 공기를 다 채워 먹었다.


날씨가 너무 예뻐 보이길래 잠시 걷고 오기로 했다. 궁금했던 동네 베이커리 겸 카페에 가서 빵도 사 오고 책도 좀 읽고 싶어 전자책을 챙겼다. 원래였다면 버스를 탔을 테지만 오늘은 걸었다. 집 앞 작은 천을 따라 놓인 산책로를 따라 쭉 위로 올라갔다가 잠시 클렌징 워터를 사러 올리브영에 들렸다. 원래 사려고 했던 브랜드가 있었는데 같은 브랜드 내에도 제품 종류가 너무 많았다. 하나는 수분 보충에 좋다고 했고, 다른 건 피지 조절에 좋고, 또 마지막 하나는 민감성 피부에 좋다고 했다. 민감성 피부에 좋다는 제품의 뒷면에는 보습과 진정에 좋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작은 글씨로 쓰인 설명을 하나하나 읽다가 '결국 이 제품도 보습에 좋다면 수분라인과 뭐가 다르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랐다. 잠시 고민하다 결국 진정과 수분을 모두 잡아준다는 민감성 제품을 사기로 했다.


매장을 둘러보다 보니 클렌징 워터를 묻혀서 쓸 화장솜도 필요할 것 같았다. 화장솜도 종류가 너무 많았는데, 그중 눈길을 끈 건 히알루론산 파우더가 묻어있다는 화장솜이었다. 화장솜에 들어 있는 히알루론산 성분이 피부를 더 촉촉하게 해 준다고 적혀 있길래 또다시 혹해서 집어 들었다. 사람들은 피부 진정도 하면서 보습도 하고 싶어 하고, 일반 화장솜과 히알루론산 가루가 묻어있는 화장솜 사이에서는 히알루론산 가루가 묻어있는 화장솜을 고른다. 일명 일석이조, 1+1의 효과를 얻고 싶어 하는 건데 이런 세상에서 나도 일석이조의 효과를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이전에 어떤 책에선 '정말 특출 나다'라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A라는 성질 하나를 가진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B라는 다른 성질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때 A와 B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감성적인 사람, 똑소리 나게 일을 잘하면서도 인간미 있는 사람, 수학도 진짜 잘하는데 영어도 진짜 잘하는 사람. 그 책을 보고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이 각박한 세상에서 선택받을 확률이 더 많아진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마치 진정과 보습이 둘 다 되는 클렌징 워터처럼, 또 화장솜인 주제에 히알루론산 가루가 묻어있는 제품처럼.


올리브영을 나와 동네 베이커리에 가서 명란 바게트와 소금 에그타르트를 사고(여기서도 일석이조의 효과가 적용된다. 바게트인 동시에 명란이 들어있고, 에그타르트이면서 소금이 묻어있기 때문에 나의 관심을 더 자극했던 게 아닐까?) 창가에 앉아 히비스커스 티를 마셨다. 챙겨 온 전자책을 읽으며 오후의 여유를 즐겼다. 카페 와서 책을 읽는 걸 항상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쉴 시간이 생기고 나니 집 밖에 잘 나가 지지가 않았다. 향긋한 히비스커스 티를 마시며 쏟아지는 햇살을 가까이에 두고 책을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좋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한 손엔 클렌징 워터와 화장솜을, 다른 손엔 명란 바게트와 소금 에그타르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제 남편의 말을 떠올렸다. 예전에 친한 언니가 '내 보물 1호는 남편이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나도 내 남편을 두고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남편은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남편이 옆에 와서 가만히 안아주며 이런 말을 했다.


"있잖아, 내가 방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거기엔 한 주인공이 나와. 이 주인공이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한 여학생의 리사이틀의 초대를 받게 되는데 그 리사이틀 장소가 버스에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가야 나오는 아주 먼 곳에 있는 거야. 그렇게 버스에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서 장소에 도착했는데 막상 그곳에선 연주회도 열리지 않고 그 여학생도 없는 거지. 허무한 마음에 주인공이 산길의 정자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서는 크림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에 대해 잔뜩 이야기를 하고 사라진 거야."


"뭐야, 이야기가 그게 끝이야?"


"음, 주인공이 이 이야기를 자신의 동생에게 해주는데, 그 동생도 너랑 똑같은 말을 해. '뭐야, 그게 끝이야?'라고. 그 말을 듣고 주인공이 이렇게 대답해. '응 그게 끝이야. 그리고 그 당시에 이 사건은 나에게 상처를 줬던 것 같아. 불가사의하고 이상하고 이유조차 알 수 없고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그걸로 인해서 나는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그 순간 정자에 내리쬐던 햇살과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이런 게 바로 인생이 아닐까? 불가사의하고 가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일로 상처를 받고 또 지나서 이런 장면들을 기억하는 것.'


그러니까 너의 지금도 비슷할 거야. 이 순간은 크게 상처가 되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유조차 모르겠고, 불가사의해서 너무나도 고통스럽지만 원래 이런 게 인생인 거. 나중에 돌아보면서 아 그때 그 정자에 햇빛이 비쳤었지, 한 할아버지가 있었지, 하는 거."


원래 불가사의한 이유로 상처를 받는 게 인생이라는 책의 내용에, 또 이런 말을 해주는 남편의 따뜻함에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남편은 울리려던 게 아니었는데 자려는 애 잠을 괜히 깨웠다며 머쓱해했지만.


불가사의한 이유로, 원인도 모른 채로 삶의 길을 잃는 것. 매일 출렁이는 감정을 오롯이 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것. 하지만 또 우울하다고 해서 24시간 내내 마냥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1분 1초 숨을 쉬는 순간이 너무 버겁고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짓눌리기도 하지만 이런 삶에서도 우울과 행복은 공존한다. 


어제는 그토록 울었던 내가 오늘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가끔 나를 질식시키는 우울감의 바닷속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은 분명 있다. 남편의 따뜻한 말, 아침햇살에 반짝이던 나뭇잎, 소소하게 올리브영에서 쇼핑을 하던 순간, 카페에서 마시던 향긋한 히비스커스 티,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보글보글 끓이는 닭 한 마리의 고소한 향.


삶은 이유 없이 계속된다. 우울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이 끝날 것 같지 않던 바다가 마침내 끝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바다가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우울하지만 행복한 날들, 불안하지만 행복한 날들은 이어진다. 우울과 행복, 불안과 행복은 공존 가능하다. 어제는 울었던 내가 오늘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우울하고 또 때로 불안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었다. 우울하지만 가끔 행복하고, 불안하지만 가끔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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