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Anora, 2024) 션 베이커
션 베이커 : 미국 작가주의 영화감독. 「탠저린(2015)」으로 주목을 받았고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아노라」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 노동자에게 이 상을 바친다.” 베이커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했던 말이다. 베이커의 수상소감처럼, 그는 주로 소외된 계층, 이민자, 성 노동자 등을 주인공으로 다룬다.
그는 ‘의미’와 ‘재미’ 중 ‘재미’를 조금 더 고려하는 몇 안 되는 작가주의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라고 말하며,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보편적인 사회 이슈도 담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힌 바 있다. 베이커는 작가주의적 성향의 영화감독임에도 마블 영화나 분노의 질주 시리즈 등의 상업 영화들도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커는 항상 사회 변두리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구조적인 모순을 들춰내온 창작자다.(그는 실제로 20대에 마약 중독으로 사회 밑바닥까지 간 적이 있다.) 베이커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일정 이상으로 규모를 키우지 않는 데 있다. 「아노라」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음에도, 베이커는 더 큰 규모의 영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그가 헐리우드 유명 영화인들의 파티에 가는 것보다 미국의 하위문화를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 베이커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 예산 수준을 뛰어넘으면 편집권을 보장받을 수 없고 이것은 내게 너무 중요한 문제다.” (영화적)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형식 또한 고민할 때, 진정한 작가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베이커가 잘 보여준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이게 할 수는 있다.” 베이커의 전언이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하지만 베이커의 말처럼, 영화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이게 할 수는 있다.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철학은 세계를 바꿀 수 없지만, 보이지 않던 ‘개념’을 보이게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철학과 영화는 세계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던 ‘사람’과 ‘개념’이 보이게 되었을 때 세계는 조금씩 변화하게 되니까.
사랑은, 때로 슬픔으로 질주하는 이를 향한 따뜻한 폭력이다.
1.
‘아노라’는 창녀다. 돈을 받고 몸을 판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아노라’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건 ‘이반’일 뿐, ‘아노라’는 ‘이반’과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대부분의 자본가 2세들이 그렇듯, ‘이반’은 철부지다. ‘기쁨’이 아닌 ‘쾌락’을, ‘사랑’이 아닌 ‘계약’만을 원하는 철부지들. 그런 철부지들은 성급한 ‘쾌락’만을 쫓는다. 성급하게 섹스하려는 ‘이반’에게 ‘아노라’는 엄마처럼 말한다. “템포를 낮춰야 더 즐겁게 더 오래 할 수 있어” 이것이 얼마나 서러운 말인지 알고 있는가?
노동자에게 직업은 정체성이 된다. ‘아노라’에게 섹스는 생업이었기에, 그녀는 사랑하는 방식조차 섹스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최고로 좋은 것을 주고 싶다. 그런데 ‘아노라’가 줄 수 있는 거라곤 섹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이반’에게 최고로 좋은 섹스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노라’는 ‘쾌락’이 아닌 ‘기쁨’을, ‘계약’이 아닌 ‘사랑’을 원하기에 템포를 낮춰서 더 즐겁게 더 오래 ‘이반’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서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결혼식을 하러 떠난 라스베거스 호텔에서 ‘아노라’는 ‘이반’에게 말한다. “네가 나중에 보고 싶어질 것 같아” 그리고 혼잣말처럼 되묻는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해?” 이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모습 아닌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이는 자신의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 자꾸만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노라’의 진심은 ‘사랑’에 가닿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뒤틀어진 마음이다. 러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가난과 소외에 시달렸던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돈’이다. 아니 그녀에게 돈은 중요성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토대, 즉 세계관 그 자체다. 그녀가 무엇을 보건, 무엇을 바라건, 그 모든 것들은 모두 돈이라는 삶의 토대 위에서 해석된다. 이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끼친다고 믿는) 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물건을 집어 던지는 지랄맞은 사람이 된 이유고,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섹스’밖에 없는 사람이 된 이유 아닌가.
돈은 ‘아노라’의 세계관이다. 그녀는 돈을 통해 세계를 본다. 그러니 그녀의 ‘사랑’이 모래성이 될 것은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을 테다. 그녀가 원했던 것이 ‘사랑’이었을 때, 그 ‘사랑’은 돈이라는 부실한 삶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아슬아슬한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다. 양손에 게임기를 든 이반의 품에 안긴 ‘아노라’는 이미 직감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꿈만 같은 결혼이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끝날 것임을.
우리가 바로 ‘아노라’ 아닌가? 모든 노동자는 창녀 아닌가? 몸을 쓰지 않고도 삶을 영위 해나갈 자본이 없는 노동자들, 가진 것은 오직 몸뿐인 노동자들. 이들은 돈을 받고 몸을 팔 수밖에 없다. 몸을 파는 형태만 다를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역시 날카롭고 사나운 마음에 휩싸이고, 사랑하는 이에게 줄 것이 ‘섹스’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 아닌가? 나는 이런 노동자의 서러움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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