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생체권력'
기묘한 불쾌감, 자유롭지만 답답한 느낌
“요즘 왜 이리 답답하냐?”
“뭐가 답답하냐? 여기가 군대냐? 월급 나오지, 퇴근하지, 주말에 쉬지, 연차도 쓸 수 있는데”
직장을 다닐 때 동료와 나눴던 대화다. 동료의 이야기는 분명 옳았다. 직장은 군대에 비하면 한 없이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원하면 연차도 쓸 수 있고, 월급도 나오니까. 하루 종일 교실에 갇혀 있어야 했던 학창 시절, 몇 개월을 부대 내에 갇혀 있어야 했던 군대 시절에 비하면 직장은 분명 자유로운 천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분명 답답했다. 이건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어느 대학생이 자신을 가장 답답하게 하는 공간이 바로 집이라고 했다. 가장 자유롭고 편한 공간을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단연 집 아닌가? 그런 집이 불편하다니. 의아함에 물었다. ‘부모님이 엄하시니?’ 그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는 집에서 눕고 싶으면 눕고, TV 보고 싶으면 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집에 들어오기가 싫을 정도로 집이 답답하다고 했다.
나와 그 대학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직장이든, 집이든, 분명 자유로워서 전혀 답답할 이유가 없는데도 답답할 때가 있다. 그 기묘한 불쾌감을 느낄 때가 있다. 자유로운데 답답한, 이 기묘한 불쾌감은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답답함은 근본적으로 부자유에서 온다. 그러니 어떤 공간에서, 혹은 어떤 관계에게 답답함을 느낀다면 자유를 찾아 떠나면 된다. 그렇게 가슴을 조여 오는 그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자유로운 곳에서 답답함을 느낄 때다. 이미 자유롭기에 답답할 이유가 없는데도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올 때, 우리는 멘붕에 빠지게 된다. 어찌 안 그럴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해서 자유를 찾아 떠나가고 싶은데, 바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자유로운 공간이니 말이다. 직장, 집은 분명 답답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이미 자유롭다. 그러니 그 답답한 곳을 떠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유롭지만 답답한, 그 기묘한 불쾌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감시와 처벌’의 역사를 추적한 미셸 푸코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는 미셸 푸코다. 푸코라면 우리가 때로 느끼게 되는 자유롭지만 답답한, 그 기묘한 불쾌감이 ‘생체권력’(bio-power)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다. ‘생체권력’이라는 난해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푸코의 사유를 천천히 따라 가보자. 먼저 그의 저작 들 중 「감시와 처벌」에 대해 알아보는 편이 좋겠다.
「감시와 처벌」의 표면적 문제의식은 간단하다. 이 저서는 ‘감금은 처형보다 인간적인 형벌인가?’라는 표면적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푸코는 그 표면적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순종시키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확히는 권력이 육체와 정신을 순종시키는 방법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드러낸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 통해 감시와 처벌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변해왔는지를 집요하고 치밀하게 추적했다.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애초 처벌은 끔찍한 공개처형이었다. 이러한 형식의 처벌은 봉건적 사회의 왕(군주)권에 기초한 것이었다. 공개처형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범죄나 체제 전복적 시도(쿠데타, 모반)를 차단하려고 했다. 이러한 처벌은 “하지 말라는 짓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라는 일종의 ‘보복’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푸코는 지속되던 ‘보복’으로서의 처벌이 다른 형식의 처벌로 변하기 시작한 지점에 주목한다.
18세기에 이르러, ‘보복’은 ‘길들임(훈육)’(discipline)으로 바뀌게 된다. 범죄자도 인간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은 ‘인간을 행형제도(범법자에 대한 교정·교화와 사회복귀를 위하여 교육을 시키는 제도)와 길들임(훈육)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푸코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감옥은 단순한 ‘처벌권력’에서 규율에 의해 법적 주체로 훈련·교정·교화시키는 ‘길들임 권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도소라는 개념(처형이 아닌 교정의 장소)은 이렇게 탄생했다.
‘파놉티콘’이라는 감옥
얼핏 보면, ‘보복’(처형)에서 ‘길들임’(감금)으로 변화한 것이 사회적 진보처럼 보인다. 우선, 범법자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고문하지 않으니까. 그뿐인가? 그네들을 길들이고 훈육해서 교정, 교화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인간적인가. 하지만 푸코는 ‘처형보다 감금이 더 인간적이다’라는 우리의 일반적 믿음에 금을 낸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 설계 방법인 ‘파놉티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주위에는 원형의 건물로 에워싸여 있고, 중앙에는 탑이 하나 있다. 탑에는 원형 건물 안쪽으로 향해 있는 여러 개의 큰 창문들이 뚫려 있다. (중략) 중앙의 탑 속에서 감시인을 한 명 배치하고, 모든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 사람씩 감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감시와 처벌」
간단히 말해, 파놉티콘은 ‘일망 감시 체계’다. 전통적인 감옥은 죄수들을 한데 모아놓고 간수는 따로 떨어져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파놉티콘은 한 명(간수)이 모두(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다. 한 명의 간수가 가운데 탑에 있고, 그 탑 주위로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죄수는 각 방에 따로 갇혀 있는 구조다. 파놉티콘은 간수들은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는 감옥이다. 이 파놉티콘에 대해서 푸코는 설명을 덧붙인다.
파놉티콘은 ‘바라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공간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다. 「감시와 처벌」
파놉티콘은 ‘바라봄과 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킬 뿐 결코 고문하거나 처형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길들이고(훈육) 교정·교화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처럼, 정말 고문하고 처형하는 공간보다 길들이고 교정하는 파놉티콘이 정말 더 인간적인 것일까? 여기서 푸코는 ‘감시’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파놉티콘의 핵심은 ‘감시’다. 여기서의 감시는 일반적 감시, 즉 그저 지켜보는 것 이상의 의미다. 신체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 신체를 항상 속박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감시’다. 이른바 규율과 지도를 위한 ‘감시’다. 푸코는 길들임과 교정·교화를 목표로 하는 곳, 대표적으로 감옥이라는 공간에 이러한 규율과 지도를 위한 ‘감시’가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영민했던, 푸코는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
푸코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이 사회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푸코의 통찰은 번뜩이는 동시에 섬뜩하다. 감옥에 갇힌 죄수만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규율과 지도를 위한 ‘감시’를 통해 길들여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파놉티콘이라는 장치는 아주 다양한 욕망으로부터 권력의 동질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기계 장치다. 현실적인 예속화하는 허구적인 관계로부터 기계적으로 생겨난다. 따라서 죄인에게 선행을, 광인에게 안정을, 노동자에게 노동을, 학생에게 열성을, 병자에게 처방의 엄수를 강요하기 위해서 폭력적 수단에 의존할 필요 없다. 「감시와 처벌」
먼 옛날부터 “현실적인 예속화”, 즉 노예를 구속하려는 권력은 항상 있어 왔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 예속화(속박)는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가능했다. 권력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때리느라 힘들고 피가 사방에 튀어 지저분한 이런 일은 얼마나 번거롭고 비효율적인가. 권력은 드디어 파놉티콘이라는 “아주 다양한 욕망으로부터 권력의 동질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기계 장치”를 발견한 것이다.
파놉티콘에서 발전된, 감시를 통한 길들임의 기술은 이제 학교와 군대, 공장으로 확대된다. ‘파놉티콘’이라는 통제와 길들임의 원형적 모델이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죄인, 광인, 노동자, 학생, 병자 모두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폭력적 수단에 의존할 필요 없이도” 노예화(예속화)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라는 번뜩이지만 동시에 섬뜩한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푸코는 오랜 시간 속박시키고 감시하는 처벌이, 잔혹하지만 신속하게 죽음으로 이르는 공개처형보다 더 큰 공포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푸코의 ‘생체권력’(bio-power)
이제, 우리네 이야기로 돌아가자. 자유로운 데도 답답한 이유가 '생체권력' 때문이라고 말했다.「감시와 처벌」의 역사를 쫒아온 우리는 ‘생체권력’이라는 난해한 개념을 이해할 준비가 됐다. ‘생체권력’은 ‘생체(생명)에 대한 권력’이다. 즉, 생체(생명)에 대해 가해지는 권력이 바로 생체권력이다. 푸코는 이 생체권력은 ‘육체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먼저, ‘육체 규율’로서의 생체권력에 대해 푸코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육체의 조련, 육체적 적성의 최대화, 육체적 힘의 착취, 육체의 유용성과 순응성의 동시적 증대,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통제체제로의 육체의 통합, 이 모든 것은 ‘규율’을 특징짓는 권력 절차, 즉 ‘인체의 해부-정치’에 의해 보장되었다. 「성의 역사 1」
파놉티콘으로부터 시작된, 감옥·학교·군대·직장의 일상적 감시를 통한 길들임은 우리의 육체에 가해진다. 육체를 조련하고, 육체의 힘을 착취하고, 육체를 유용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순응(복종)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감옥·학교·군대·직장에 순응(복종)하는 육체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처럼 ‘육체규율’을 통해 신체에 직접 작용하고 신체에 새겨지는 권력이 바로 ‘생체권력’이다.
‘생체권력’은 어렵지 않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본 적 있을까? 평생을 감옥에 있다가 출소해서 사회로 나온 한 흑인 노인이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로 나왔지만 간수의 허락이 없으면 소변조차 볼 수 없는 육체로 이미 길들여졌다. “40년 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을 누러 갔다. 허락을 안 받으면 한 방울도 안 나온다.”라는 그 흑인의 화장실 독백 장면은 생체권력이 어떤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집, 학교, 군대, 직장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도와 종류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식으로 우리의 육체와 내면이 이미 길들여지지 않았던가.
푸코는 특정한 권력이 우리의 몸 구석구석을 미시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생체권력(bio-power)'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더 나아가 푸코는 ‘생체권력’은 한 개인의 육체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률,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관리 같은 조건의 조절을 통해 ‘인구조절’까지 통제한다고 말한다. 생체권력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 개인의 육체와 사회 자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고 보았다. 결국 ’생체권력’이란 특정한 권력이 우리(인간)의 신체에 개입하여 길들여서 인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권력이다.
‘생체권력’의 끔찍함
이러한 생체권력은 과거의 권력보다 더 무섭고 집요하다. 과거의 권력은 칼로 상징되는 권력이다. 즉 ‘죽게 만들고 살게 내려두는’ 권력. 놀랍게도 생체권력은 그 반대로 기능한다. 생체권력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다. 이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세기 정치적 권리에서 발생한 가장 대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주권의 이 오래된 권리, 즉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새로운 다른 권리에 의해 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됐다는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주권의 권리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입니다. 그런 뒤에 새로운 권리가,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정착하게 됩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이 얼마나 무섭고 집요한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려두는’ 권력(고문, 처형)에는 저항하지만, ‘살게 만들고 죽게 내려두는’ 권력(감시, 훈육)에는 저항 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시를 통해 서서히 길들여 나가는 생체권력은 저항하기 더욱 어렵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다짜고짜 때리는 선생에게는 반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너에게 실망했다”라고 훈육하고 길들이는 선생에게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그토록 하기 싫은 공부를 꾸역꾸역 하게 만드는 선생(부모)은 때리는 선생(부모)이 아니라, 조용히 감시함으로써 길들이고 교정하려는 선생(부모) 아니었던가. 그런 선생(부모)의 훈육과 교정은 우리의 신체에 새겨져 알아서 기게 만든다. 이것이 생체권력의 무서움이다. 이처럼 생체권력은 신체에 직접 작용하고 새겨져, 이미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기에 알아서 기게 만든다. 그래서 저항조차 어렵다. 이제 알겠다. 직장과 집이 분명 자유로운데도 왜 그리 답답했는지 말이다.
'직장'과 '집'이라는 파놉티콘
내가 다녔던 직장은 ‘생체권력’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파놉티콘이었다. 사원은 제일 앞자리에, 대리는 그 뒤에, 그 뒤로 과장, 차장이 앉아 있었고, 제일 뒷자리는 부장이었다. 핵심은 ‘바라봄-보임’의 관계다. 사원은 보이기만 할 뿐 볼 수 없다. 반대로 부장은 보기만 할 뿐 보이지 않는다. 그런 파놉티콘적 기계적 장치가 완성되어 있다면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답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서서히 길들여지고 교정당하면서 자신다움의 잃어가는 과정이 어찌 답답하지 않을까. 차라리 직장이 교묘한 감시로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폭력으로 ‘처벌’했다면 7년이란 시간을 직장에서 괴로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집이 답답하다는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는 가수가 되고 싶어 했다. 부모는 아들이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많이 배운 부모는 결코 윽박지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아들의 방을 엿봤다. 아들이 공무원 준비를 하는지 노래를 듣고 있는지 감시했다. 아들은 저항할 수도 없었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아들의 이야기에 부모는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부모는 “가수도 좋지만 기왕 시작한 공무원 공부에 최선을 다해 봤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 자상하고 친절한 타이름은 길들임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길들임은 마지막 저항조차 무력화시킨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것이 없는 집이지만 그토록 답답했던 것이다.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체권력
생체권력은 신체에 각인된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학교·직장·국가라는 권력에 길들여진다. 급기야, 권력이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게 된다. ‘부모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거야’ ‘서울대는 내가 원해서 가고 싶은 거야’ ‘업무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나라를 위한 희생은 내가 원하는 거야’라는 자발적 복종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생체권력이 없다면 자발적 복종도 없다. 푸코는 ‘생체권력을 통해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육체를 처벌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사회 통제 수단’ 임을 간파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과거 권력은 잔혹하지만 그래서 저항할 수 있다. 여기에 자발적 복종은 없다. 하지만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체권력은 표면적으로 인간적인 것 같다. 그래서 저항은커녕 그 권력에 감읍마저 하게 된다. 생체권력의 작동방식인 감시와 통제, 길들임은 언제나 ‘다 너희를 위한 거야!’라는 인자한 표정으로 다가오니까. 그렇게 생체권력은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 낸다. 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가! 지배당하면서 저항하기는커녕 감사한 마음으로 자발적 복종을 한다는 것이.
과거 군주가 우리를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었다면, 지금의 사회는 살게 만들어주고 죽게 내려둔다. 마찬가지로 예전의 사장(부모, 선생)은 ‘윽박지르고’(죽게 만들고), ‘무관심했다면’(살게 내버려두고), 지금의 사장(부모, 선생)은 ‘타이르고’(살게 만들고) ‘실망하는’(죽게 내버려두고) 방식으로 우리를 길들인다. 우리의 신체는 이런 교묘한 생체권력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당하고, 결국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집, 학교, 직장,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그런 생체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생체권력과 자발적 복종
자유롭지만 동시에 답답한, 그 기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겠다. 그것은 생체권력으로 인해 발생한 ‘자발적 복종’ 때문에 발생한 느낌이다. 자발적 복종의 방점은 ‘복종’에 있다. ‘자발적’이라는 자유는 생체권력에 의해 지배당한 신체에 의해 발생된 허구적 느낌이다. 주말에 쉬고 연차도 쓰는 직장, 딱히 하지 말라는 것이 없는 집이기에 자유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직장·집에서 이미 충분히 감시당하고 통제 당해 길들여졌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지만 답답한 그 설명할 길 없는 기묘한 불쾌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푸코는 소중하다. 권력의 지배는 개체의 신체뿐만 아니라 내면에까지 집요하게 관철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푸코는 권력의 문제는 선명한 구도인 ‘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열하는 자아-검열당하는 자아’ 관계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푸코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권력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지배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복종을 강요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발적이라고 오해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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