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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와 대화할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꼰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아니 대화할 수 없는 대상

“너도 대학생이니 투표해야지. 누구 찍을 거니?”
“딱 정한 건 아닌데, 문재인 아니면 심상정 찍으려고요”
“빨갱이들은 안 돼! 빨갱이를 찍어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환갑을 훌쩍 넘긴 아버지와 대학생 아들이 나누는 대화다. 아들은 아버지의 근거도 논리도 없는 빨갱이 이야기에 입을 닫아버렸으니, 이걸 대화라고 할 수 도 없다. 첨예한 주제인 정치 이야기여서일까? 아니다. 다른 주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젊은이와 어른들은 대체로 대화가 안 된다. 젊은이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라고 생각하고, 어른들은 ‘너희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뒤가 꽉 막혀 도대체 대화가 안 되는 어른을, 흔히 '꼰대'라고 한다.

     

 물론 ‘젊은이’와 ‘어른’(혹은 꼰대)을 가르는 기준은 물리적 나이가 아니다. 물리적 나이는 스물이지만 환갑보다 더 경직되고 닫힌 생각을 갖고 있는 꼰대도 있고, 물리적 나이는 환갑이지만 스무 살 보다 더 유연하고 열린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어떤 경우든 젊은이와 꼰대는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이다. 대화를 하더라도 끝은 언제나 둘 중 하나다. 싸우거나 포기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거야!’라고 말하는 젊은이와 ‘그렇게 살면 굶어 죽는다!’고 말하는 어른(꼰대)의 대화를 상상해보자. 그 끝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둘 모두 다혈질이라면 그 대화는 곧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질 것이고, 그렇게 싸우다 지치면 대화 자체를 ‘포기’해버릴 것이다. 싸움과 포기, 이것이 젊은이와 꼰대가 나누는 대화의 모든 것이다. 대화가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과정이라면, 젊은이와 꼰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대할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젊은이와 어른(꼰대) 사이에 대화가 안 되는 원인에 대해 흔히 ‘세대차이’로 진단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과 결과를 바꾼 답에 불과하다. 대화가 무엇인가?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 아닌가. 세대차이 때문에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세대차이가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세대차이는 대화를 가로막는 원인이 아니라 대화가 되지 않은 결과다.      


 비단 세대차이 문제만 그럴까. 진정한 대화를 통해 해소되지 못할 입장 차이는 없다. 문제는 ‘대화하지 못함’ 그 자체다. 그렇다. ‘젊은이-꼰대’처럼 큰 입장 차이를 가진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서로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두 사람이 대화가 안 돼서, ‘당신이 틀렸어!’라며 싸우거나 ‘당신은 그렇게 사슈’라며 포기해버리는 이유는 ‘대화하지 못함’ 그 자체다.     


 이제 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절망이 주어진다.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떤 입장 차이를 가진 상대와도 대화할 수 있다’는 희망.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면 상대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며 싸우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 현실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깝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애초에 대화가 안 되기에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결국 우글거리는 타자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젊은이는 어른(꼰대)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고, 어른(꼰대)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시골로 간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답을 줄 철학자는 천재 중에 천재, 비트겐슈타인이다. 번쩍이는 천재 철학자답게, 그는 젊은 시절 ‘나는 철학을 끝내노라’ 말하며 케임브리지라는 명문 대학을 떠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바로 이 시골 마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지금 우리의 고민,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깊게 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서 약 6년을 머물면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그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지역 주민들과 심각한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비트겐슈타인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독일의 철강왕이라 불리는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다양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제 알 것도 같다. 비트겐슈타인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왜 그리 많은 마찰이 있었는지.

      

 부유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비트겐슈타인과 가난한 그래서 배운 것 없는 촌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게다. 대화가 안 통했을 테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판검사를 부모로 둔 아이가 의사가 되어 오지에 봉사활동을 갔단다. 의사는 거기서 공부에 재능을 보인 아이를 발견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아이의 부모에게 “이 아이는 농사짓기에 아까운 아이예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부모는 “공부는 어릴 때마 하모 되는 거 아입니까?”라고 답했다. 그 말에 의사는 “말이 안 통하는 인간들”이라며 화를 냈단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슷한 일들로 지역 주민들과 다투게 되었을 거라 짐작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건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대화가 안 되는 우리의 문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는 자신의 저서 「철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들의 전체를 언어게임’(언어놀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언어게임’(Sprachspiel)이란 개념을 통해 ‘대화 안 됨’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언어게임’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겠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란 영어, 한국어, 독일어와 같은 특정한 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언어라도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에는 대학의 ‘언어’가 있고, 오스트리아 시골 마음에는 그 나름의 ‘언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라는 모국어를 쓰지만, 거기에는 법원의 언어, 재래시장의 언어, 유치원의 언어가 별도로 존재한다. 이처럼 다양한 삶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이 서로 다르게 혹은 유사하게 존재한다. 심지어 동일한 한 단어라도 삶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용례로 혹은 그 반대로도 사용될 수도 있다. 



'씨발'의 용례

     

‘씨발’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맞았을 때 ‘씨발’의 의미는 “왜 때려!”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씨발’은 “슬프다”라는 의미다. 약자를 도와주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돌아서며 했던 ‘씨발’은 “난 한심한 놈이야!”란 의미고, 화려한 스포츠카를 보며 내뱉은 ‘씨발’은 “진짜 멋있는데!”라는 의미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서 ‘언어’는 이처럼 특정한 언어만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언어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왜 언어'게임'이란 용어를 사용했는지 알 것도 같다. 장기를 둘 때 ‘포’가 없어도 아무 상관없다. 장기를 두는 사람이 500짜리 동전을 ‘포’라고 약속하면 되는 꺼닭이다. 하지만 누군가 “아니 왜 500원짜리를 장기판 위에 두는 거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장기라는 '게임'을 할 수 없다.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서로 약속된 언어 대신, 각자 자신만의 삶의 맥락에서 형성된 ‘언어’를 상대에게 강요할 때 대화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을 친근함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그 집의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설득'은 '대화'가 아니다. 강요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시골 사람들과 다투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맥락에서 ‘언어’와 시골 사람들의 삶의 맥락에서 ‘언어’가 달라서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이니 하고 선언한다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나는 도대체 왜 그 타자에게 근거들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물론 줄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근거들의 끝에는 (결국설득이 있을 뿐이다.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개종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라). 확실성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로 온 자신을 미개인을 개종하려는 선교사 같은 인물로, 그곳의 사람들을 원주민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는 자신도 선교사도 모두 상대를 ‘대화’의 대상이 아닌 ‘설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설득은 결국 강요고, 강요는 싸움으로 귀결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옳고 너는 틀렸으니 설득해야 하고, 설득이 안 된다면 강요해야 하고, 강요가 안 통할 때 싸움이 일어난다. 포기라는 것은 그 싸움의 힘이 팽팽할 때 귀결되는 잠정적 결론 아니던가.

    

 ‘언어게임’이 주는 통찰은 분명하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각자가 가지는 삶의 맥락이 다르다면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이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에 있다라고 수차례 강조했던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특정한 낱말의 의미는 각자 삶의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타자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맥락만큼의 다양한 언어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이란 개념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통찰이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네 현실로 돌아오자. 꼰대처럼,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답은 이렇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나는 선택하지 않는다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 각 '언어'마다 고유한 규칙이 있다면,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고유한 규칙을 있는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지한 이야기를 듣던 상대가 갑자기 ‘씨발’이라고 말할 때 화를 내면 대화가 안 된다. 그 ‘씨발’의 의미는 “와! 난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못했지”라는 감동, 혹은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라는 칭찬의 의미일 수 있으니까. 그의 삶의 맥락에서는 만들어진 언어 규칙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의 삶의 맥락이 만들어낸 언어 규칙을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 규칙을 상대에게 강요하느라 대화는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까. 물론 여기서 ‘맹목적’이란 말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상대를 신처럼 떠받들라는 말은 아닐 게다. 상대의 언어 규칙을 파악한다는 말은 결국 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인 인간이라, 진중하고 섬세하게 타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천재 철학자가 왜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른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중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언어 규칙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를 준비를 했을 때만 겨우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재인과 심상정은 빨갱이야!’라는 언어 규칙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들과 대화 화기 위해서 문재인과 심상정을 빨갱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언어 규칙을 가지게 된 삶의 맥락을 진중하고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그제 서야 보일 테다. 불과 60~70년 전, ‘남’과 ‘북’이라는 이념 차이로 참혹한 학살과 살육이 일상적으로 펼쳐지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내었던 그네들의 삶이 말이다. 빨갱이로부터 부모·형제기 죽임을 당했던, 혹은 빨갱이로 몰려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삶의 맥락을 경험했던 이들에게 중요한 건, ‘문재인’과 ‘심상정’이 아니다. 빨갱이다. 빨갱이는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기에 간교한 정치꾼들이 ‘저 사람이 빨갱이다!’라고 말하면 아직도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삶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과 대화가 가능해진다.


      

어쩌면, 대화는 사랑하는 이와만 가능한 일일지도.

어떤 상대와도 마찬가지다. 대화하고 싶다면, 먼저 상대의 삶의 맥락을 읽어 내어 그들의 언어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은 이건 옳은데 이건 틀렸어’라는 알량한 가치판단이 앞선다면, 그건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득을 하고 싶은 것이다. 설득은 대화가 아니다. 설득은 요구이고 강요다.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상대의 언어 규칙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삶의 맥락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우리는 걷고 싶다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각자만의 이상적인 언어규칙(얼음)이 있어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얼음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과 대화할 수 없게(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언어 규칙을 가진 타자가 우글거리는 거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걷게 해줄 마찰을 찾아서.   


    

 진정한 대화는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찰이 있는 그 거친 땅을 걷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만 나의 중심으로 버리고 상대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상대의 언어 규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사랑스러운 아이와 대화하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와 게임을 알려고 노력하는 하는 어느 부모처럼 말이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의 삶의 맥락을 이해해서 아이의 언어규칙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대화, 그것은 사랑이 없다면 애초에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없는 대화는 설득과 싸움, 그리고 포기만 난무하는 폭력 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기에 그들의 삶의 맥락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그들의 언어 규칙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면 상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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