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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할 때 주눅이 들까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주눅 든 알바를 위하여

밤늦은 시간 편의점에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알바의 “어서 오세요”라는 밝은 인사말 때문이다. 밝은 인사말이 왜 불편했을까? 그 밝은 인사말은 고된 삶에 지친 표정을 애써 숨겨야 가능하단 걸 알기 때문이다. 알바들은 늦은 새벽 지친 몸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손님이 오면 억지스럽게 밝게 웃어야 한다. 그 억지웃음에 알바는 더 힘이 든다. 순종적인 알바는 항상 주눅이 들어있기에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알바만 그런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 시절 나 역시 그랬다. 매일 출근길에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어깨마저 아플 지경이었다. 편의점 알바가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다면, 나는 매일 매사에 눈치를 봐야 했다. 선배, 상사의 눈치는 물론이고, 새로운 업무에 관해서도 눈치를 봐야 했다.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면 어쩌나?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일을 할 때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유는 알바와 같다. 항상 주눅이 들어 있기에 초조하고 불안한 게다. 

         

 우리는 왜 일할 때 주눅이 드는 걸까? “남 호주머니에서 돈 꺼내는 기, 지 손으로 지 눈 쑤시는 것만큼 어렵데이”라는 내 어머니의 말씀처럼, 돈 버는 게 원래 그런 걸까? 일을 해서 돈을 벌려면 항상 주눅 들어 억지웃음 짓고,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조금 이상하다. 일을 한다는 건 고용주와 피 고용주간에 계약을 이행하는 거 아닌가? ‘나는 노동력을 제공할 테니, 당신은 그에 합당한 돈을 주시오’라는 계약. 그 계약에 ‘일을 할 때는 항상 주눅 들어 있어야 한다’는 조건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맺었던 계약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돈을 받는 것인데 우리는 왜 주눅이 들까?


이데올로기의 철학자, 알튀세르

이 질문에 답해 줄 철학자는 ‘루이 알튀세르’다. 알튀세르라면 이 질문에 “이데올로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테다. 일을 할 때 주눅 드는 이유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니 선뜩 납득이 어렵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생경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쉽게 말해보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란 ‘세상 사람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표상’이란 단어를 알면 알튀세르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표상’이란 무엇일까? ‘표상’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represent'는 ‘표상하다’는 의미 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표상하다’는 말은 ‘눈앞에 떠올린다’는 의미인 셈이다. ‘비행기’란 말을 듣고 ‘✈’를 떠올린다거나, 반대로 ‘✐’을 보고 ‘연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표상’이다.

    

 이제 ‘표상체계’라는 개념 역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표상은 단어를 통해 사물을 눈앞에 재현하는 것, 또는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머릿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가 ‘표상체계’다. 즉,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떠오르도록 해주는 개념이나 상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를 ‘표상체계’라고 한다. 이 표상체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표상체계’만큼 우리네 삶에 깊숙이 개입된 것도 없다. 아니 ‘표상체계’가 없다면 삶 자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표상, 표상체계의 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책’이라는 표상체계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 살 배기 아이가 책을 입에 넣고 먹으려는 것은 표상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매일 출근하는 것도 자신이 직장인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기’(개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팀장이 팀원들을 매일 닦달하는 것도 자신이 팀장임을 ‘떠올리지’(판단하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행동과 판단이든 언제나 특정한 표상과 함께 진행된다. 우리가 일관된 행동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일관된 표상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입에 넣지 않는 것, 무단결근을 하지 않는 것, 팀원이 팀장을 닦달하지 않는 것도 다 일관된 표상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표상체계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표상체계는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집단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표상체계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책’을 보고 ‘읽는 것’이라는 걸 떠 올 수 있는 이유는 주위 집단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상체계가 가정, 학교, 직장 같은 특정한 제도적 장치 속에서 만들어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가정, 학교, 직장에서 길러진 사람은 그에 맞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그에 맞는 표상체계를 갖는다.


 표상체계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책을 보고 ‘이건 책이니 먹지 말고 읽어야지’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책을 읽지 않는다. 일단 어떤 표상체계가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게 된다. 남자이며, 한국인이며, 대학생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나는 남자고, 한국인이며, 대학생이니 바지를 입고, 김치를 먹고, 책을 읽어야 해’라며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무의식적이다.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이다.      



‘세상 사람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 이데올로기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세상 사람들의 표상체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알튀세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사회이건 이데올로기가 없는 사회는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이라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알튀세르를 구조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대한 상상적 체험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변형시키고 왜곡시켜 보여준다. ‘사람이면 김치를 먹어야지’라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다.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길러지는 과정에서 생긴 변형되고 왜곡된 상상적 체험일 뿐이다. 유럽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길러진 어떤 사람은 ‘사람이라면 치즈를 먹어야지’라고 말할 테니까. 알튀세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이데올로기에서 발견하는 표상, 즉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 조건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현실적 세계이다.”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이지만, 각각의 개인들에게 그것은 현실적 세계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사람들은 상상적 표상 속에서 살지만 그것을 각자의 삶에서 현실적 세계라고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존재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럴 것이다’라고 당연시되는 방향으로 변형된 관계를 보여준다.  

    


남직원의 이데올로기, 여직원의 이데올로기


예를 들어보자. 무난하게 돌아가던 한 회사가 있다. 갑자기 물량 주문이 쏟아져 업무가 많아졌다.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여직원들은 여러 가지 사정상 정시에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하는 남자 직원들은 ‘동료의식이 없다’며, ‘이건 역차별이다’라며 여직원을 비난했다. 그 남자 직원들에게 여직원들의 동료의식 없음, 역차별은 분명 ‘현실적 세계’다. 남직원들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분명 그렇다. 그런데 남직원들의 현실적 세계는 정말 ‘현실적’인 걸까?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 입장에서 그들의 ‘현실적 세계’를 살펴보자. 남직원들이 여직원을 비난했던 건 자신이 야근을 하는 원인이 여직원의 칼퇴근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 세계’가 아니다. 사장이 업무가 늘어난 만큼 직원을 더 뽑았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남직원이 야근을 했던 원인은 ‘여직원의 칼퇴근’이 아니라 ‘사장의 노동력 착취’다. 남직원은 여직원들을 비난했던 건 자신들만의 ‘상상적 관계’(여자들 때문에 늦게 남자가 일을 많이 하는 거야!)가 ‘현실적 세계’라고 오인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직원들의 이데올로기는 ‘남-여’ 관계를 중심에 둔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직장은 원래 일이 많은 곳이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표상체계’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자본가-노동자’ 관계를 중심에 둔 이데올로기는 일이 많아지면 급여를 올리든가 직원을 더 뽑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표상체계’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자본가-노동자’를 중심에 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남직원의 현실적 세계는 명백하게 오해된 허구적 세계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는 각자가 쓴 안경인 셈이다. 빨간 렌즈의 안경을 쓴 사람은 모든 세상이 빨갛다고 믿고, 파란 렌즈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 모두 파랗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믿게 된다. 이데올로기라는 안경을 쓴 인간은 각자의 렌즈 색깔로 인해 허구적 사실을 현실이라 믿게 된다.     



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을까?


“왜 일을 할 때 주눅이 드는 걸까?”라는 질문에 이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을까?” 이 질문만큼 중요한 질문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그 작동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우리 시대 대부분은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다. 


 지금의 병적인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돈이 최고야. 그러니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을 주는 사람 비위를 잘 맞춰야!” 이건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살기 편한 이데올로기. 서글프게도 우리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일할 때 주눅 들게 된 것이다. “그래 돈을 버는 게 다 그렇지”라는 허구적 사실을 현실이라 믿게 된 것이다.



 우리는 분명 왕도 귀족도 없는 민주공화국 사회에 산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봉건적 계급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돈 있는 사람들이 들어서지 않았나. 의식적으로야, “나는 사장의 노예가 아니야. 계약을 통해 나의 노동력을 임금으로 교환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정확히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무의식적 이데올로기는 이렇다. “돈을 받아있으니, 고객이나 사장 눈치 보고 비위를 맞춰주는 게 당연해.” “월급이라는 게 욕먹어서 나오는 거니, 직장 생활하며 인격적 모멸 정도는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이것이 우리가 정당한 노동하고 돈을 벌면서, 아니 심지어 자본가에게 부당한 착취를 당하면서도 늘 주눅 들어 눈치 보고 불안해야만 하는 근본적 이유다. 우리가 일하며 주눅이 드는 이유는, 노동자이면서도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된 대가다.  



우리네 삶을 긍정할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일을 하면서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자본가의 삶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긍정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자본가의 안경이 아니라 우리의 안경이 필요하다. 우리의 안경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혹시 안경을 쓴 채로 세수를 하려다 깜짝 놀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안경(이데올로기)이 무서운 이유는 안경을 오래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건 빨간 렌즈의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이 빨갛다고 확신하게 된다.

      

 우리네 삶을 긍정할 이데올로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주 긴 시간 자본가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다.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이유는 세상이 빨갛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코 위에 빨간 렌즈의 안경이 얹혀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허구적 상상이 현실적 세계가 아니었음을 자각하게 될 테다. 물론 그걸 안다고 바로 우리의 안경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네 삶을 긍정할 안경을 쓰기 위해서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알튀세르는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이 말에서 우리의 삶을 긍정할 이데올로기를 만들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 물질적 존재며물질적 장치를 통해 존재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와 거기서 행해지는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의미다. 교회(물질적 장치)에 나가서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실천을 해야 신(이데올로기)을 믿게 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본가적 이데올로기로 갇힌 이유도 가정, 학교, 직장, TV 같은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에서 그에 합당한 실천(공부, 대화, 교육 등등)했기 때문 아닌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가의 안경을 내면화된 것이다. 우리네 삶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에서 특정한 실천을 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일 될 게다. 우리 사회에 자본가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은 공동체도 그런 실천을 하는 사람도 이미 너무 드무니까.

      

 하지만 주눅 들어 있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당당한 주인의 삶을 원한다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노력을 미룰 수 없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노동자의 삶을 긍정하는 철학 책 읽는 것도 좋다. 돈보다 사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노래하는 시와 영화, 소설을 보는 실천도 좋겠다. 더 나아가 그런 실천을 하는 작은 모임을 찾거나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물질적 장치를 마련하고 작은 실천을 통해서 조금씩이지만 우리네 삶을 긍정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갈 수 있을 테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효과를 갖는 물질적 존재며, 물질적 장치를 통해 존재”하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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