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라캉의 '신경증'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한때 유행했던 책이다. 그 책이 유행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안다. 시대와 공간을 불문하고,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서로 모르기에, 대충 얕은 관계로 살아가면 될 것을. 그건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치명적 감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왜 치명적 감정일까? 상대와 얕은 관계로 머물 수 없어서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와 깊은 관계를 동반한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 심지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저도 알고 싶은 게 사랑 아닌가.      


 그런 사랑하는 상대가 나와 완전 다른 존재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다는 발버둥. 이제 세상에 사랑싸움이 왜 그리 흔한지 알 것도 같다. 서로를 너무나 알고 싶지만, 서로 다른 행성에 살아온 탓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 그 간극 때문이다. 이 간극은 어느 연인 사이에나 있기에 사랑싸움은 그리도 흔한 것일 테다. 원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세상의 절반인 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질문은 중요하다. “남자/여자는 어떤 존재인가?”      



정신분석의 철학자, 라캉

이 질문에 답을 해줄 철학자는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다. 정신분석학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이란 주제를 그 대상으로 한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의식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 무의식은 결국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라캉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유명한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망(원할 때)할 때 그것이 내 의식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타자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여성이 어느 날 백화점에서 본 명품 가방이 눈에 아른거려 사고 싶어 졌다. 그녀에게 “왜 그 가방이 사고 싶으냐?”라고 묻자. 그녀는 “제 스타일이에요”라고 말할 테다. 이것은 그녀가 나의 의식이 그것을 욕망한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라캉은 그녀에게 이리 말할 것이다. “아니, 네가 그 가방을 사고 싶은 이유는 세상 사람(타자)들이 그것을 원한다(욕망)는 사실이 네 무의식에 각인되었기 때문이야” 명품 가방을 갖고 싶은 이유는, 내 스타일(욕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자의 스타일(욕망), 정확히는 타자가 사랑해줄 만한 스타일(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라캉의 주장, ‘내가 원하는 것은 타자가 원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선뜩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식의 사고는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라캉의 욕망이 생물학적인 충족욕(식욕, 수면욕, 성욕 등등)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의식적이라기보다 무의식적이다.      


 내가 원해서 공부한다고 믿지만, 사실 부모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이지 않았던가. 내가 좋아서 하이힐을 신는다고 믿지만, 사실 그건 그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이지 않았던가. 심지어 내가 원해서 돈을 번다고 믿지만, 사실 그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이지 않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원한다고(욕망) 믿지만 사실 그건, 누군가부터 사랑받고 싶다면 무의식적 발현일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타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 때문에 타자의 욕망이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다. 누군가의 욕망에 따를 때, 우리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욕구(need), 요구(demand), 그리고 욕망(desire)
     

이제 궁금해진다. 타자의 욕망은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는 걸까? 여기서 라캉은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욕망'(desire)을 구별한다. 먼저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이다. 이 욕구는 만족을 추구하며 만족시켜줄 대상을 찾고자 하는 충동이다. ‘요구’는 무엇일까? ‘욕구’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인간은 일차적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만족시켜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달리 말해, ‘요구’는 ‘욕구’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배고픔’은 ‘욕구’이고, “밥 차려 줘!”는 ‘요구’인 셈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무엇일까? 먼저 ‘욕구’와 ‘요구’의 차이를 고민해보자. ‘욕구’가 클까? ‘요구’가 클까? 반드시 ‘욕구’가 크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욕구’만큼 ‘요구’할 수 없다. 사회·문화적으로 수많은 ‘요구’가 금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만큼만 ‘욕구’를 ‘요구’할 수 있다. ‘섹스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고 해도, 아무 장소에서, 아무에게나 그 ‘욕구’를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욕구’는 언제나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 충족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욕구-요구’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바로 여기서 욕망이 출현하게 된다. 

     

 ‘욕구-요구’ 사이의 격차로 인해서 ‘욕망’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욕구’가 발생했다고 치자. 현실적 조건 때문에 ‘밥이라도 줘’라고 ‘요구’했고 다행히 배를 채웠다. 하지만 ‘욕구’는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았기에, 케이크를 먹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상상을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이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장된다는 점이다. 충족되지 못한 그 욕망은 딸기 케이크로 다시 초콜릿 케이크로 심지어는 제과점을 차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확장된다. 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장되는 욕망의 흐름을 ‘욕망의 환유 연쇄’라고 한다.


‘욕망의 환유 연쇄’가 남긴 흔적, ‘신경증’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욕구’(성욕, 식욕)는 온전한 형태로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에 변형된 형태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결핍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엄마(아빠)와 섹스하고 싶지만 그것은 사회·문화적으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래서 엄마(아빠)와 비슷한 여자(남자)를 찾아 섹스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남자)는 엄마(아빠)가 아니기에 근본적인 결핍은 피할 수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결핍을 만족시키려 ‘또 다른 여자(남자)를 만나고 싶어’ 혹은 ‘다 필요 없고 돈이 최고야’라는 끊임없는 ‘욕망의 환유 연쇄’가 일어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런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캉은 이 원형적 욕구의 금지로 인해 발생한 결핍 때문에 인간은 ‘신경증’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은 아마 ‘신경증’자일 게다. 오해는 마시라. 이 글을 읽는 사람을 모두 정신이상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놀랍게도 라캉에게 정상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 이라는 세 가지 임상 구조 중 반드시 하나에 속한다. 


 그나마 그중에서 가장 정상에 가까운 임상 구조가 ‘신경증’이다. 이 ‘신경증’이라는 증상을 통해 처음 질문, “남자와 여자는 어떤 존재인가?”에 답할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이 ‘신경증’은 다시 세부적으로 ‘강박증’ ‘히스테리’ ‘공포증’로 구분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강박증’과 ‘히스테리’다. ‘강박증’과 ‘히스테리’라는 ‘신경증’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조금 더 섬세하게 알 수 있다.    


   


‘강박증’, 남자의 다른 이름 

   

남자는 대체로 강박증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박’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집착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난해한 라캉의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설명한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이란 저서를 들춰보자. “강박증자는 대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 (강박증자)에게 상대방은 대체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것일 뿐이다.”      


 강박증자는 상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 그 대상의 욕망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대상은 대체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것이다. 쉽게 말해, 강박증자는 구호는 “내 맘대로 할 거야!”다. 강박증자는 자기의 욕망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타인의 욕망은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이것은 일반적인 남성의 모습 아닌가.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자. 대체로 남자는 여자 친구의 감정이나 기분을 섬세하게 살피려 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피력하고 관철시키기에 바쁘지 않았던가. 실제로 라캉은 남성은 대부분 이 강박증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여자’, ‘히스테리’의 다른 이름

여자는 대체로 히스테리적이다. 정신분석학 개념인 ‘히스테리’ 역시 일상적인 의미인, ‘짜증’ ‘신경질’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히스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시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으로 돌아가자. 히스테리 환자는 강박증자처럼 대상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내려 한다그녀는 스스로 타자의 욕망을 지속시킬 수 있는 특정한 대상이 되려고 한다.”     


 히스테리는 강박증의 반대 구조다. 히스테리 환자는 상대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내려고 하고, 자신이 그 상대가 욕망하는 특정한 대상이 되려고 한다. 쉽게 말해, 히스테리 환자의 구호는 “네 맘대로 해”다.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의 욕망보다 언제나 상대의 욕망에 집중한다. 히스테리는 결국 상대의 욕망에 나를 맞추려는 신경증적 증세다. 이것은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 아닌가. 연애를 할 때 여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보다 남자 친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고 기꺼이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라캉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성은 이 히스테리, 상대의 욕망에 나를 맞추려는 신경증적 증세에 지배받는다고 한다.      



신경증의 사랑이 아닌, 성숙한 사랑을 위하여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욕구’를 온전히 ‘요구’할 수 없어 남겨진 결핍, 즉 ‘욕망’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우리는 대부분 신경증자다. 남자는 ‘강박증’이라는, 여자는 ‘히스테리’라는 신경증을 안고 사는 존재다.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은 많지만, 그 다름을 근본적으로 묻고 들어가면 그 바닥에는 ‘신경증’과 ‘히스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남녀의 차이는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옳다, 그르다’ 혹은 ‘정도의 차이’ 문제를 떠나, 남자는 강박적 성향이, 여자는 히스테리적인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는 각자에게 주어진 신경증을 그대로 안고 살아도 좋은 걸까? 어찌 보면 남자와 여자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맘대로 하려는 사람과 네 맘대로 하라는 사람이 만난 것이니까.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안다. 신경증과 히스테리의 만남의 끝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걸. 남자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느라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끝내는 자신마저도 심연의 허무에 시달린다. 여자는 언제나 상대의 욕망의 맞추느라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려 기묘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신경증과 히스테리의 만남의 종착역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신경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경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 신경증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남자는 강박증을 잘 통제해서 히스테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 욕망이 아니라 상대의 욕망을 섬세하게 살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여자는 히스테리를 잘 통제해서 강박증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욕망이 아니라 내 욕망에 집중하고 표현해야 한다. 이건 비단 남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신경증의 사랑이 아닌, 성숙한 사랑이 가능할 테다.     



화성에서 온 ‘사람’과 금성에 온 ‘사람’이 함께 잘 사는 법

     

분명 남자는 강박적인, 여자는 히스테리적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남자가 강박적인 것도, 모든 여자가 히스테리적인 것도 아니다. 강박적인 여자도 있고, 히스테리적인 남자도 있으니까. 아니 한 사람에게 강박적인 면과 히스테리적인 면이 모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깝겠다. 그러니 이제 중요한 것은 남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 자체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강박적인 사람과 히스테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 것이냐?’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이제 이 질문에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은 성숙한 사랑을 하는 방법과 같다. 라캉의 진단처럼, 정상인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대체로 “내 맘대로 할 거야!”(강박증)라고 말하거나 “네 맘대로 해!”(히스테리)라고 말하는 신경증자다. 그런 신경증자인 우리가 서로에게 덜 상처 주고 덜 상처받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균형 감각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두 신경증인 강박증과 히스테리를 절묘하게 오가는 균형 감각. 강박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히스테리로, 히스테리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강박증으로 옮겨가야 한다.   

   

 때로는 나의 욕망에 집중하고, 때로는 상대의 욕망을 섬세하게 헤아리며 강박증과 히스테리라는 두 신경증을 자유자재로 횡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게 상처받고, 적게 상처 내며 타자와 어울려 잘 살 수 있다. 잊지 말자. 결국 잘 산다는 건,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없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거란 걸. 이렇게 화성에서 온 ‘사람’과 금성에서 온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 테다. 

이전 12화 계획 없이 살면 안 되나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한입 매일 철학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