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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리셋하고 싶나요?

질 들뢰즈 '아장스망'

인생을 리셋하고 싶나요?


규석은 영어 공부 중이다. 취업에 필요한 성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시험 날이 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처음 듣기 평가 두 문제를 놓쳐버렸다. 세 번째 문제부터라도 집중했다면 저번 달보다 성적이 올랐을 수도 있었으련만 규석은 그러지 못했다. 한 숨을 푹 내쉬며 시험지를 뒤집고 엎드려 버렸다.   
 미선은 흰색 신발을 좋아한다. 그녀는 흰색 신발에 자그마한 얼룩만 생겨도 참지 못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얼룩이라서 조금 더 신어도 좋으련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직장의 고된 업무를 끝내고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으로 일주일에도 몇 번이나 신발을 세탁해야 했다.     


 규석과 미선은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둘의 정서적 상태는 닮아 있다. 둘 모두 삶의 일부를 리셋하고 싶어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규석은 왜 시험을 포기해버렸을까? 첫 두 문제를 놓쳐서 이번 시험은 이미 글렀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번 시험은 리셋하고 다음 시험에 집중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미선도 마찬가지다. 미선은 왜 매번 신발을 세탁하는 걸까? 옆 사람이 미선의 신발을 살짝 밟았을 때 이 신발은 이미 글러버렸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래서 그 신발을 깨끗이 세탁해서 신발을 리셋하고 싶은 것이다. 

          

 규석과 미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 역시 그렇다. 큰 사고를 당해 몸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혹은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아 마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는 규석과 미선처럼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자체를 리셋하고 싶어 질지 모른다. 삶이 우리 마음처럼 안 풀려갈 때 혹은 이미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인생을 리셋하고 싶다. 그래서 깔끔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되어 원하는 삶을 만들고 싶다.  


   

삶을 리셋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어리석다고 한다. “삶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삶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라고 덧붙이면서. 지극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옳은 말은 별 위로가 안 된다. 규석도 미선도 삶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쯤은 다 안다. 규석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문제부터라도 집중하는 게 옳다는 걸 안다. 미선도 얼룩이 좀 묻은 신발을 그냥 신어도 된다는 걸 안다. 다 알지만 안 되는 것이다.      


 삶 자체는 되돌릴 수 없지만, 아니 없기에, 되돌릴 수 있는 이미 틀려버린 ‘시험’과 ‘신발’이라도 리셋하고 싶은 것이다. 규석도, 미선도 이미 글러버린 ‘시험’과 ‘신발’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규석도, 미선도, 우리도 다들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삶을 리셋하고 싶다는 건, ‘포기하고 싶다’는 절망이 아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절박한 희망에 가깝다. 그래서 그네들을 쉽게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없다. 이제까지의 불행한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물론 규석과 미선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그들 갖고 있는 희망은 ‘절망적 희망’인 까닭이다. 삶을 리셋하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가 되려는 것은 퇴행적인 방식이다. 이런 퇴행적 방식은 결국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든 삶은 진입하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로’니까. 그렇다면 이제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삶을 리셋하는 퇴행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 

이 질문에 답해줄 철학자는 질 들뢰즈다. 그는 「차이와 반복」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를 쓴,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런 들뢰즈에게 ‘인생을 리셋하지 않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라고 답해줄 것이다. 그리고 ‘아장스망을 통해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여 줄 것이다.     


 들뢰즈의 대답은 난해하다. 그의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들뢰즈의 ‘생성’이란 개념부터 파악해보자. 들뢰즈는 ‘생성’이란 개념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규정하려고 했다. 이 ‘생성’이란 개념을 단순히 ‘만들어짐’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만들어짐’에는 두 가지 형태의 만들어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창조’로서의 만들어짐과 ‘생성’으로서의 만들어짐. ‘창조’는 쉽게 말해, ‘무無에서 유有’로의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말한 ‘생성’은 ‘창조’와 다르다. '생성'은 ‘유有에서 유有’로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에서 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스피노자의 철학」


 얼핏 난해하게 들리지만, 들뢰즈의 '생성' 개념을 알고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백지를 갖고 있지 않기에" 무無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생성'은 있음과 있음 그 사이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들뢰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은 ‘없음’無(백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있음’有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즉, 들뢰즈에게 모든 존재는 ‘생성’되는 것이다.   



 두 가지, 유有


세상 만물을 ‘창조’한 종교적 ‘신’을 믿지 않는다면, 들뢰즈의 ‘생성’의 개념은 낯설지 않다. 책은 종이에서 나오고, 종이는 나무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나’도 부모에게서 나오고, 그 부모는 조부모에게 나왔으니까.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가 아니라 ‘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유’에는 두 가지 ‘유’가 존재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유'에서 '유'가 나오게 되지만, ‘존재하는 유’와 ‘존재하게 만든 유’는 다른 까닭이다.      


 책은 분명 종이에서 나왔지만 종이와 책은 다르고, ‘나’는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부모는 다르지 않은가. 즉 '유'에는 ‘존재하는 유’(책, ‘나’)와 ‘존재하게 만든 유’(종이, 부모)가 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존재하는 ‘유’는 어떻게 바로 그 ‘유’가 되는가? 그러니까 종이가 반드시 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부모가 꼭 ‘나’를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종이는 때로 공책이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때로 누나와 형을, 때로는 동생을 낳기도 하기 한다. 존재하는 유는 어떻게 바로 그 유로 ‘생성’되었을까? 


들뢰즈의 ‘아장스망’agencement

이제 들뢰즈의 '아장스망'이란 개념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다. ‘아장스망’agencement은 ‘배치’arrangement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유(부모)에서 유(아기)가 나오지만, 나온 유(아기)가 특정한 바로 그 유(‘나’)가 되는 이유는 ‘아장스망’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특정한 유(존재하게 만든 유)들의 ‘배치’에 의해 단독적인 바로 그 유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아장스망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대화 Dialouges」    


 책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종이-작가-편집자-출판사’라는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된 배치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나’도 마찬가지다. ‘30대의 남자-20대의 여자-쌉싸름한 맥주-감미로운 음악-호텔’이라는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유'에서 '유'가 나오지만, 나온 '유'가 바로 그 '유'인 이유는 그런 배치, 즉 아장스망 때문이다. 만약 그 이질적인 항들 중 하나만 어긋나도 전혀 다른 유가 되고 만다.     

 

 사실 ‘아장스망’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이질적인 항들의 특정한 배치를 통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경험을 충분히 갖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남자-군복-총-신병훈련소’라는 배치(아장스망)를 통해 유순한 대학생이 전투적인 군인으로 생성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여자-대학교-연인-이별통보’라는 배치를 통해 순진했던 여고생은 성숙한 여인으로 생성되지 않던가. 이렇게 우리는 이질적인 항들의 ‘아장스망’(배치)을 통해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전혀 다른 존재로 ‘생성’된다.     

 


‘이번 생은 틀렸다’고 생각하나요?   

  

‘이번 생은 틀렸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삶이 너무 버거워 사는 것이 너무 힘들 때 이번 생은 포기하고 싶어 지니까. 어쩌면 자살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살은 삶의 ‘절망’적 포기가 아니라, 이미 틀려버린 이번 생을 리셋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희망’의 몸부림은 아닐까. 지금은 그런 ‘절망적 희망’이 휩쓰는 시대다. ‘이미 틀려버린 삶을 리셋하고 싶다’는,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절망적 희망’ 말이다. 


 들뢰즈의 ‘아장스망’이란 개념은 바로 그 ‘절망적 희망’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삶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은 ‘창조’의 욕망이다. 원래 백지(무)가 있었고 지금은 그 백지가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그 종이는 찢어버리고 새로운 백지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생성’은 다르다.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원래 유가 있었고 그 유에서 새로운 유가 나오게 되니까. 그래서 아장스망(배치)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원래 존재했던, 이질적인 항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묻자. 이번 생은 틀렸으니 리셋을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 없다! 배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이제껏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질적 항들의 배치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존재로 생성된다. 지금의 모습을 긍정하면서 다른 배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정말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다. 싸구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허구적 희망이 아니다.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중략) 잠재적인 것은 심지어 실재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마치 실재적 대상이 자신의 부분들 중의 하나를 잠재성 안에 갖고 있는 것처럼.” 「차이와 반복」   


  

씨앗(실재성)=알맹이(현실성)+꽃(잠재성)

간단히 말해, ‘실재성=잠재성+현실성’이라는 말이다. 실재하는 존재는 현실적인 것 이외에 아직 발현되지 않는 잠재적인 것까지 포함된다는 의미다. 흔히 우리는 현실성이 실재성이라고 믿는다. ‘나’라는 존재(실재성)는 취업을 못하고 있고, 토익점수는 형편없고, 심지어 무기력하기까지 한 존재(현실성)라고 믿고 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반은 옳고 반은 틀렸다. ‘실재성’은 (이미 드러난) ‘현실성’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아직 드러나지 못한) ‘잠재성’마저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해하게 들린다면, 작은 씨앗 하나를 생각해보자. 씨앗(실재성)은 그저 씨앗일 뿐일까? 씨앗은 이미 드러난 모습(현실성)처럼 보잘것없는 작은 알맹이일 뿐인가? 아니다. 그 씨앗 안에는 언젠가 화려하게 필울 꽃(잠재성)이 이미 들어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씨앗(실재성)=알맹이(현실성)+꽃(잠재성)’인 셈이다. 씨앗이라는 실재성은 그런 것이다. 실재성에 이미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씨앗은 이미 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셈이다. 

     

 어떤 존재(실재성)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현실성) 이외에 앞으로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잠재성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했던 친구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취업을 못했고, 영어점수도 엉망이었고, 심지어 무기력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번 생은 틀렸다’며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했단다. 그녀는 드러난 ‘현실성’만이 ‘실재성’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자신의 ‘잠재성’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드러난 ‘현실성’은 ‘나-고시원-영어 책’이라는 아장스망에 의해 생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기력으로부터도 벗어났다. 강건하게 삶을 헤쳐 나가는 씩씩한 사람이 되었다. 씨앗이 ‘좋은 흙-비-햇볕’이라는 아장스망으로 아름다운 꽃이 되듯이, 그녀 역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아장스망을 새롭게 구성했다. ‘나-도서관-불교 책’이라는 아장스망. 언젠가 들었던, 마음이 괴로울 때 불교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그 길로 도서관으로 가서 불교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단다. 새롭게 구성된 아장스망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삶을 리셋하지 않아야, 다시 시작할 희망이 있다.     


규석도 미선도 아장스망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규석이 ‘나-영어학원-영어공부’라는 배치를 ‘나-영화관-글쓰기’라는 배치로 구성할 수 있다면 다른 존재로 생성될 수 있다. 두 문제 틀렸다고 시험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대신, 성실하게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미선도 ‘나-집-부모’라는 배치 대신 ‘나-여행-연인’라는 배치로 구성할 수 있다면 다른 존재로 생성될 수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얼룩 지우느라 밤새 신발을 씻는 대신 편안하게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행복한 순간에 신발에 생긴 얼룩이야 이미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     

 

 삶을 리셋하지 않아도, 아니 삶을 리셋하지 않아야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삶을 리셋해버리면 배치를 구성할 항들도 사라지게 되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껏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혹은 불편하다고 여겼던, 이질적인 항들을 연접적으로 연결시켜 새로운 아장스망을 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어쩌면 우리의 잠재성이 드러나지 않고, 계속 잠재해 있는 이유는 나와 다른 것이라고 규정해놓았던 이질적 것으로 눈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게 꽃 피우고 싶은 씨앗이, 햇볕도 비도 닿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절망적 희망이 도처에 배회하고 있는 지금은 아장스망을 점검할 때다. ‘나’(실재성)는 분명 지금 드러난 모습(현실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떤 모습(잠재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생성하게 할, 그 잠재성은 아장스망을 통해 현실성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한 배치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그래서 생경한 항들의 배치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장스망’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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