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의 철학' 프롤로그

스피노자의 생활철학을 시작하며

‘신도림 스피노자’


철학과 글쓰기를 시작하며 스스로 지은 별칭입니다. 제가 ‘신도림 스피노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철학은 유쾌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저의 ‘철학’ 때문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며 만났던 이들은 대부분 과도하게 진지하고 무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의 진지함과 무거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그 진지함과 무거움을 유쾌하고 즐거운 그릇에 담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별칭을 스스로에게 붙였지요.


두 번째 이유는 ‘빚’ 때문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을 공부하며 그들의 사유를 훔쳤습니다. 그것은 분명 빚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겨 놓은 사유의 유산이 없었다면, 저는 언감생심 철학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왜 안 그럴까요? 그네들이 없었다면, 철학에 ‘철’자도 몰랐던, 공돌이 출신 엔지니어가 어찌 철학에 발이라도 디딜 수 있었을까요. 선배 철학자들에게 빚을 진 셈이지요. 그 중에서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이가 ‘스피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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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를 공부하며 제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삶의 확신이라 자부했던 것들이 터무니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삶의 확신이 하나씩 찢겨 나갈 때마다 조악했던 사유가 하나씩 전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협소한 시야는 넓어졌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지적 변화들 보다 더 좋았던 것은 따뜻한 위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된 삶에 굽이굽이에서 스피노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돌아보니, 스피노자는 저와 결이 잘 맞는 철학자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스피노자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 갚기에 위해 저는 '신도림 스피노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모두 ‘신도림 스피노자’라는 이름 아래 있습니다. ‘신도림’스럽지만, 동시에 ‘스피노자’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철학이 꼭 현학적이고 난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현학적이고 난해하게 될 때, 철학은 과도하게 진지하고 무거워지지요. 그렇게 철학은 삶에서 멀어져갑니다. 이제 시작하는 철학 이야기는 우리네 구체적인 삶에 응답하는 철학이야기될 겁니다. 요즘 것들인, 우리네 일상에 응답하기에 때로 가볍고 유쾌하며 즐거울 겁니다. 아주 ‘신도림’스럽게 말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스럽기도 할 겁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진지하게 철학했던 스피노자의 이야기 역시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스피노자의 야심작 「에티카」의 보석 같은 원문을 최대한 많이 만나 볼 수 있게 할 요량입니다. 깊고 날카로운, 그 ‘스피노자’스러운 사유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신도림 스피노자’로서, 1600년대의 암스테르담의 스피노자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되살려 내려고 애써볼 생각입니다. '신도림'스럽지만 동시에 '스피노자'스러운, ‘스피노자의 생활철학’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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