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는 왜 의지가 없을까?”
“나 같은 의지박약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학창시절, 일기장에 3일마다 적혀있던 문구다. 왜 안 그랬을까?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작심삼일이었으니까. 의지를 다지며 세웠던 야심찬 계획은 3일 뒤면 깊은 자괴감이 되어 되돌아왔다. 철없던 시절에는 머리가 좋고, 운동 신경이 좋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3일만 공부해도 성적이 잘나오고, 3일만 연습해도 운동을 능숙하게 해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어느 사이, 나는 머리도, 운동신경도 그저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철이 들어버렸다.
철은 들은 들었지만, 부러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부러움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타고난 잠재력 대신 이제 굳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머리는 나쁘지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들입다 공부만 하는 아이. 운동신경은 없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부러웠다. 타고난 잠재력이 없어도, 굳은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리고 다시 한탄했다. ‘나는 왜 저런 의지가 없을까?’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철이 들면 누구나 알게 된다. 자신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두 가지 갈림길에 들어선다. 특별하지 않은 채로 살 것인가? 노력으로 특별해질 것인가? 그 첫 갈림길에서는 대부분은 후자의 길에 들어선다. 전자는 후자의 연속된 실패로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선택이다. 노력을 해보았지만 특별해지지 않았기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노력조차하지 않게 된 경우 말이다.
강한 의지라는 특별함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평범한 이들에게 인정, 관심, 칭찬, 갈채를 보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그래서 비범한 이들을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범해질 수 있는 타고난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비범함을 갈망한다. 방법은 안다. 간단하다. 노력하면 된다. 타고난 특별함(자질)이 없다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다시 깨닫는다. 타고난 특별함을 극복할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함이라는 걸.
‘노력하면 된다!’ 이 말이 제일 싫었다. 나는 노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만 노력할 수 있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만 끈덕지게 노력할 수 있다. 타고난 특별함 없이도 비범해질 수 있는 노력을 가능케 하는 특별함. 그 특별함이 바로 의지다. 강한 의지. 결국 비범해지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의 특별함이 필요하다. ‘타고난 잠재력’이라는 특별함. 아니면 ‘강한 의지’라는 특별함.
비범함이 대단한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모든 이들은 비범하다. 평범한 이들은 언제나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사니까. 아직 비범하지 않지만 비범한 삶을 원한다면, 둘 중 어떤 특별함에 주목해야 하는지는 어렵지 않다. ‘강한 의지’라는 특별함이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타고난 잠재력이라는 특별함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있었다면, 이 글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비범한 사람일 테니까. 평범한 우리는 강한 의지로 비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한다. ‘강한 의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스피노자의 ‘의지’
‘강한 의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스피노자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먼저, 스피노자는 ‘의지’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의지는 자유 원인이라고는 불릴 수 없고, 단지 필연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에티카, 제 1부, 정리 32)
스피노자는 의지는 ‘자유 원인’이 아니라, ‘필연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 원인’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게 생길 수 있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필연적인 원인’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쉽게 말해 ‘강제된’ 원인이라는 의미다. ‘필연적인 원인’은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원인이다. 스피노자는 그런 ‘필연적인 원인’을 ‘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당구공을 예로 들어보자. 당구대 위에 흰 공과 푸른 공이 있다. 그런데 흰 공은 아무런 외력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굴러간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흰 공이 멈춰 있던 푸른 공을 때려서 움직이게 한다. 이때 흰 공은 ‘자유 원인’이자, ‘필연적 원인’이다. 아무런 외력 가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자유롭게(외부 원인 없이) 움직였기에 그 자체로 ‘자유 원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흰 색 공은 푸른 공에 대해서 ‘필연적 원인’이다. 흰 공이 푸른 공을 때려서 푸른 공을 필연적(강제로) 움직이게 했으니까 말이다.
'의지'는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각각의 의지작용은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작용할 수도 없으며, 그 원인도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진행된다.” (에티카, 제1부, 정리 32 증명)
이제 스피노자의 ‘의지작용’에 관한 난해한 이야기도 어렵지 않다. ‘의지작용’, 즉 ‘의지라는 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지작용은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작용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의지작용’은 일종의 연쇄작용이다. 하나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의지고, 그 의지는 다시 또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한 의지라는 것이다. 그런 연쇄가 끝도 없이 이어져서 의지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무한히 큰 당구대 위에 무한히 많은 당구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중의 하나의 당구공이 움직여 다른 하나를 움직이게 하고, 그렇게 움직여진 공이 다시 다른 공을 움직이게 한다. 이런 흐름이 무한히 이뤄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스피노자의 ‘의지작용’이다. 하나하나의 당구공들이 움직이려는 의지는 그렇게 연쇄적으로 이뤄진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의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의 ‘의지’ 역시 그렇게 생겨난다.
‘의지’는 ‘있으라!’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의지박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강건한 의지를 갖고 싶었다. 그때 했던 일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일기장에 빼곡히 적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할 수 있다!’ 수백 번을 반복해서 적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강건한 의지가 아니라, 더 큰 자괴감이었다, 이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의지를 ‘자유 원인’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외력 없이도 스스로 굴러가는 공처럼, 의지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기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말처럼, 의지는 ‘자유 원인’이 아니다. 그것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절박한 내면적 외침은 늘 허사로 돌아갔던 이유다. 그렇다. 의지는 ‘있으라!’ 한다고 마법처럼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내게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의지박약이었던 내게 강한 의지가 생겼던 적이 있다. 100kg에서 70kg까지 다이어트를 했고, 지금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읽고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이건 분명 의지박약이었던 내게 마법처럼 강한 의지가 생겼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00kg에서 70kg으로 감량하는 것은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먹고 싶은 것은 못 먹고 매일 3시간씩 운동을 해야 하는 일상은 매일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강한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의지는 어디서 왔을까? 너무나 매혹적이었던 그녀 때문이었다. 뚱땡이는 싫어한다던 그녀 덕분에 강한 의지가 생겼다. ‘살만 빼면 그녀와 사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 의지로 포기하지 않고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의지’는 자신 속에 없다. 세상 속에 있다.
매일 읽고 쓰는 삶을 살고 있다. 학창시절의 나는 공부는 고사하고 책상 앞에 30분을 앉아있으면 몸이 뒤틀렸다. 그런 내가 매일 거르지 않고 하루에 서너 시간씩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런 끈덕진 노력을 가능케 했던 강한 의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너무나 매혹적인 철학자와 작가들 때문이었다. 그네들 덕분에 나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 의지로 포기하지 않고 나의 철학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의지는 ‘자유 원인’이 아니다. ‘필연적 원인’이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의지를 수백 번 다진다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강건한 의지를 원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타자들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자신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원인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렇게 의지박약에서 강건한 의지를 갖게 된 이들을 많이 만났다. 절대 살을 못 뺀다던 아이가 복싱이라는 원인을 만나 살을 뺐다. 책 읽는 게 제일 싫다던 아이가 소설이라는 원인을 만나 매일 책을 읽는다.
그들의 강한 의지는 자신 속에서 자유롭게 생긴 게 아니다. 그들의 ‘의지작용’은 다른 원인(복싱, 소설)에 의해 결정되고,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의지는 그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의지박약인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항상 자신의 내면에만 머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각자의 비범한 삶으로 인도할 의지는 자신 속에 없다. 세상 속에 있다. 그러니 과감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원인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 원인을 발견했을 때 알게 될 테다. 강한 의지, 적어도 우리를 활력넘치는 삶으로 인도할 강한 의지는, 비장한 어떤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어떤 것이라는 걸. 타자들로 인해 촉발된 의지를 갖게 된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강한 의지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그때 자신도 놀랄 만큼의 강건한 의지를 지닌 자신을 만나게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