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마투라나 ‘관찰자’
어떻게 타자의 세계를 볼 것인가?
‘관찰자의 오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강요의 문제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는 이 관찰자의 오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마뚜라나는 진정한 관찰자와 관찰하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관찰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관찰자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중략)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먼저, 마뚜라나는 아무 고심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을 관찰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우리들 삶의 대부분을 관찰자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관찰자란 자신이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 것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눈으로 세상을 관찰할 때 대상에만 빠져 있지 말고, 지금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중이라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관찰하기다. 그것은 달리 말해, 곤충의 관찰과 인간의 관찰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
관찰하기는 자기성찰이고, 관찰자는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이다. 자기성찰이 무엇인가?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 자체에 빠져 들지 않고 그 행동을 거리 두어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아닌가. 진정한 관찰자가 되면, 강요하기 어렵다.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공부해야 돼!”라는 강요는 어렸을 때 공부하지 않아서 불행해진 삶의 관찰이 구성한 세계일뿐이다. “게임은 나쁜 거야!”라는 강요는 게임을 해서 불행해진 삶의 관찰이 구성한 세계일뿐이다.
이는 모두 진정한 관찰하기가 아니다. 자신이 관찰했던 대상(공부, 게임)에 매몰되어 있을 뿐, 자신이 대상(공부, 게임)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 ‘관찰하기’가 가능해지면 강요는 무의미하다. ‘내가 옳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옳을 수 있지만, 그 옳음은 내 세계의 옳음이지 다른 세계의 옮음은 아닐 수 있음을 안다. 관찰자는 그 사실을 안다.
강요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걸어갈 수 있는 방법 역시 마뚜라나를 통해 알 수 있다. 마뚜라나에 따르면, 세상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먼저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세상이 구성된다는 말 아닌가. 강요의 다그침에 불안해하거나 주눅들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관찰자로서 관찰하기 해나가면 된다. 그때 우리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강요에 흔들리고 불안할 때 마뚜라나의 이 말을 되새길 시간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