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까요?"

움베르토 마투라나 ‘관찰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

“어렸을 때 공부해야 돼!” “방은 항상 깨끗해야 하는 거야!” “게임은 나쁜 거야!” “직장은 꼭 다녀야 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흔하다. 부모나 선생, 선배 혹은 친구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위축되고 답답하다. 특히나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는 더욱 그렇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하면 되잖아.’ ‘방은 쓰다보면 어지럽혀지는 거잖아’ ‘게임하면 스트레스 풀리던데’ ‘직장은 안다녀도 벌고 살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들은 부모, 선생, 선배, 친구가 확신에 찬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때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까요?”


답은 어렵지 않다.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하나 같이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의심이 없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 그 확신이 바로 폭력적인 강요로 이어지는 이유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으니, 내 생각을 강요하는 일은 당연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그것은 선의일지도 모르겠다.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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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뚜라나의 ‘관찰자’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다. 본질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질문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은 어디서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R. Maturana에게 들어보자. 마뚜라나라면, ‘나의 생각의 옳다!’는 확신은 ‘관찰자’의 오류로부터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뚜라나의 ‘관찰자’란 무엇일까?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 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마뚜라나는 ‘관찰자’는 지식, 인간, 세계, 우주 등 모든 것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즉, ‘관찰자’가 있기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는 세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관찰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뚜라나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관찰하기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관찰자의 소멸, 즉 관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한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고 그 강아지만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마뚜라나는 그 강아지가 죽음과 동시에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다고 말할 테다. 이 놀라운 인식의 전환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언젠가 아들과 곤충박물관에 놀러간 적이 있다. 거기에는 곤충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체험해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아들은 그 망원경을 보고 난 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곤충들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사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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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의 세계들


그 망원경을 통해 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 초점이 안 맞아 흐릿해 보이거나 대상이 여러 개로 보이기도 한다. 아들은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본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곤충이 본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그 당혹감 앞에 아들은 곤충이 사는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결론 내린 셈이었다. 바로 이 결론이 마뚜라나의 주장이다. 동물이 보는 세상이 있고, 곤충이 보는 세상이 있고, 인간이 보는 세상이 있다.


이는 모두 다른 세상이다. 인간이 보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결론내릴 어떠한 근거도 없다. ‘인간-동물-곤충’의 관계만 그런가. ‘인간-인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세계가 구성된다. 부자인 삶을 관찰했던 사람과 가난한 삶을 관찰했던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같은 세계에 살지 않는다.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이 부자인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관찰자로 있었던 각자의 세상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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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강요, 그리고 그 강요의 토대가 되는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은 ‘관찰자’의 오류로부터 온다. 관찰자의 오류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관찰자’로 있었기에 존재했던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는 판단이다. 곤충 망원경을 보고, ‘곤충은 세상을 잘못보고 있구나!’라는 판단 말이다. 세상은 유일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관찰자의 수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마뚜라나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강요의 형식으로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와 관련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게다가 명백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관찰자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유일한 세상이 존재하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관찰자들의 각자의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 곤충은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관찰한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 판단 내린다. 폭력적 강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강요는 ‘나는 옳다!’는 확신에서 오고, 그 확신은 ‘내가 본 세상이 유일하다’는 생각에 기초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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