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의 ‘차이’와 ‘강도’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들
“나는 키가 작아” “나는 뚱뚱해” “나는 가난해” “나는 부모가 없어” 우리에게는 싫은 내 모습이 있다. 키가 작은, 뚱뚱한, 가난한 , 부모가 없는 자신의 모습. 그것이 싫다. 누구나 자신의 모습 중 싫은 모습이 하나 즈음 있다. 세상에 완벽한,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에게 부정적인 모습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그 부정적인 모습이 콤플렉스가 될 때다.
콤플렉스가 무엇인가? 삶이 그 부정적인 모습에 매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키가 작다는 이유로 키 큰 친구에게 이유 없이 주눅 들게 될 때. 하루 종일 뚱뚱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게 될 때.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잣집 친구를 이유 없이 시기하게 될 때.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두 부모가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단정하게 될 때. 그럴 때가 있다. 그것은 ‘작은 키’, ‘뚱뚱함’, '가난함' ‘엄마(아빠) 없음’이 우리의 콤플렉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괴롭히는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검은 점이 몇 개 찍힌 하얀 백지가 있다. 그 검은 점이 우리의 어둠이고 부정적인 면이다. 즉, 콤플렉스다. 그리고 드넓은 하얀 여백은 우리의 밝음이고 긍정적인 면들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을까? 몇 개의 검은 점에만 계속 머문다. 그것을 보느라, 정작 그 넓은 하얀 여백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콤플렉스가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방식이다.
몇 개의 작은 검은 점에 집중하느라, 정작 그 넓은 밝고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간명하다. 그 검은 점에서 시선을 떼고 하얀 여백을 보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검은 점(콤플렉스)을 보지 말라!’고 말하면 할수록 그 검은 점에 더욱 신경이 쏠리게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검은 점에서 시선을 뗄 수 있을까? 즉, 이 질문이 중요하다.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되기(becoming)’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 들뢰즈’에게 들어보자. 그는 「안티오디푸스」 「차이와 반복」 「천개의 고원」 등의 저서를 통해, 명실공히 서양 현대철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프랑스 철학자다.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들뢰즈는 어떻게 답해줄까? ‘-되기(becoming)’로 극복가능하다고 말해 줄 테다. ‘-되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지배적이고, 관성적이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지금의 (지배적, 관성적, 익숙한)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되기’를 통해 콤플렉스는 극복 가능하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은 키는 콤플렉스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는 왜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성적이고 익숙한 ‘나’에 계속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지배적이고 관성적이며 익숙한 ‘나’에서 벗어나 다른 ‘나-되기’가 되면 어떻게 될까? 작은 키는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니다. “키 좀 작은 게 뭐 어때서?”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된다.
다른 ‘나-되기’
이제 다시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다른 ‘나-되기’가 가능할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콤플렉스였던 것은 계속 콤플렉스로 남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가난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평생을 돈에 매인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하지만 이전의 ‘나’를 벗어나 다른 ‘나-되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콤플렉스는 극복된다. 현재의 ‘나(-되기)’는 콤플렉스에 지배되던 과거의 ‘나’가 아니니까 말이다.
작가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지배적이고 관성적이고 익숙한 나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나’(-되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콤플렉스도 극복했다. 그의 콤플렉스는 나쁜 머리였다.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늘 노심초사했고, 무슨 일을 시작하든 나쁜 머리 때문에 주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는 머리 나쁜 작가야” 농담 삼아 말할 정도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는 어떻게 과거의 ‘나’를 벗어나 ‘나-되기’가 가능했을까?
‘강도’intension
‘-되기’는 그냥 되지 않는다. 힘이 필요하다. 들뢰즈는 그 힘을 ‘강도强度’라고 표현한다. 강도는 말 그대로 강한 정도를 의미한다. 즉 세기(힘)다. 이제 우리가 콤플렉스에 집착하는 ‘나’에서 벗어나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비밀이 보인다. ‘-되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 즉 “‘강도’를 어떻게 발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답만 찾으면 된다. 그 힘으로 우리는 과거의 ‘나’와 다른 ‘나-되기’가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강도는 현실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 규정자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에 따르면, 강도는 어떤 존재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아직 꽃이 아니다. 하지만 씨앗은 꽃으로 언젠가 ‘현실화’된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어떤 힘이 바로 ‘강도’다. 마찬가지로,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나’에서 벗어나 콤플렉스를 극복한 ‘나-되기’가 현실화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강도’다. 이제 그 ‘강도’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차이’
“강도는 차이다. (중략) 강도량은 즉자적으로 비동등한 것을 포괄한다. 강도량은 양量의 차이를 나타낸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는 ‘강도’가 ‘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아하다. ‘강도’는 어떤 세기, 즉 힘인데 그것이 ‘차이’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층 건물 옥상 난간에 돌멩이 하나가 올려져있다. 그때 그 돌멩이는 위치에너지라는 ‘강도’(세기,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강도’(위치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 높이다. 3층이라는 높이 때문에 발생한 위치에너지가 바로 그 돌멩이가 갖고 있는 힘, 즉 강도다. 그럼 이제 다시 묻자. 그 높이는 어디서 왔을까? 바로 ‘차이’다. ‘땅바닥-3층’ ‘차이’ 그 자체가 바로 높이 아닌가. 그러니 ‘강도’는 바로 ‘차이’다.
“강도량은 즉자적으로 비동등한 것을 포괄한다”는 말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땅바닥’과 ‘3층’은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그 비동등한 것을 포함하지 않으면 강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둘을 포함해야 높이가 발생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강도량은 그 양(높이)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 말은, 양(높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강도량(위치에너지) 역시 커진다는 의미다 ‘강도’가 바로 ‘차이’라는 것은 다른 예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50℃의 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50℃라는 온도는 그 물의 ‘강도’(세기, 힘)다. 그것은 어디서 왔을까? 100℃의 물과 0℃ 외부 온도의 ‘차이’로 인해서 발생된 것이다. 즉, 50℃라는 ‘강도’는 바로 두 물체의 온도 ‘차이’이다. 이 강도를 통해 돌멩이도 물도 다른 존재로 ‘-되기’가 가능해진다.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져 바닥에 홈을 내는 ‘홈-되기’가 가능하다. 50℃의 물이 식으며 주변의 ‘온도상승-되기’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강도는 현실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