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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구는 누구보다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왔지만 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고 그 자신도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인생의 절반을 망쳤음을 알고 있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그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한 후회와 회한, 분노가 함께 떠올라 그는 괴로왔다. 그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부성애에는 뭐랄까... 섞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많은 잡스런 감정들이 더덕더덕 함께 붙어 있었다.
21살 군대를 다녀 온 복학생 이 정구는 복사꽃을 닮은 듯 하얀 신입생을 쫓아 다녔다. 그녀의 이름은 김 연수였다.
연수는 꽤 이름 있는 제분 회사의 딸이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대선에 개입했던 대기업쪽의 계략으로 아버지의 회사가 넘어가고 집안이 몰락해 국비 장학금으로 피아노과에 재학중이었다. 연수와 같은 과 같은 학년에 재학중이던 현경은 매일 연습실 앞에서 장미꽃을 들고 연수를 기다리는 정구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 줄을 잘 타 승승장구하는 대기업의 3대 주주가 된 아버지를 둔 현경은 소심하고 말 없던 어두운 소녀에서 안하무인의 이중인격자가 되어갔다. 그녀에게 성적으로도 앞서는데다 지극정성인 남자친구까지 둔 연수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미움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진 않지만…
졸업반이 되자 이 정구는 여기저기 대기업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었지만 그다지 기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염세적인 탓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를 해도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해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니까... 대부분은 조금 못 해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을 탄 인간들이 윗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경주 출신으로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와 매일 같이 쪼달리는 생활을 하던 어머니를 보며 자란 이 정구는 야망이 큰 사내였다. 좁은 방에서 두 남동생과 같은 방을 쓰며 자란 이 정구에게 가족이란 행복하고 포근한 울타리가 아닌 절망스럽고 구질구질하며 싫어도 챙겨야 하는 지겨운 그것이었다.
이 정구 같은 사내의 사랑은 ‘정복욕’이다.
캠퍼스의 남학생들이 한 번쯤은 돌아보는 예쁜 여학생이 정작 그만 바라보는 처지가 되자 지고지순했던 그의 사랑은 변해갔다. 그녀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고 거만했다. 하지만 김 연수는 묵묵히 그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쏟고 있었다. 조 현경이 점점 아랑곳하지 않고 정구에게 정성을 들이는가 하면 따로 만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사랑에 있어 약자는 항상 더 사랑하는 사람인 법이다.
그녀가 임신을 알게 된 것과 독일 유학을 국비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정구씨...
어쩌면 나...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정구씨가 가지 말라 한다면 난 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졸업반이라 바쁘다며 멀리하는 정구를 만나려 눈 내리는 길바닥위에서 두 시간을 떨다 겨우 귀가하는 그를 마주친 연수는 아이를 가진 이야기는 하지 않고 유학 이야기를 꺼내며 정구의 눈치를 살폈다.
“난 네가 꼭 독일에 갔으면 좋겠어. 어차피 집도 망해서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는데 잘 되었잖니. 가서 꼭 성공해서 돌아와. 하지만 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어. 나란 놈은... 가정을 꾸리고 아비가 되는 데에는 맞지 않아. 그렇지만 좋은 기회가 있다면 결혼을 할지도 모르겠어. 내가 필요한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기적이라고 욕하고 떠나도 좋아.
믿건 안 믿건...
내가 진심으로 사랑이란 걸 한 여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너 하나 뿐일거야. “
이 정구는 준비한지 2년만에 사시에 합격을 했다. 집안이 보잘 것 없어도 그 당시 사시 합격자는 선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키도 크고 훤칠한데다 이른 나이에 사시에 합격한 엘리트 이정구는 단연 인기가 높았다. 그는 여전히 연수를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 현경을 마음에 둔 것도 아니었다. 딸이 몇 년 째 짝사랑을 하고 있는 가난한 고학생 이 정구를 처음에는 조 현경의 집에서도 탐탁치 않아 했었지만 이 정구가 사시에 합격을 한 후 달라졌다. 현경의 아버지는 철두철미하고 똑똑한 이 정구를 자신이 주주로 있는 기업 요직에 두고 싶어했다.
“남자는 말야. 이 머리, 머리가 중요한거라구. 될 놈은 머리가 아주 꽉 찬 놈들이란 말이야. 내 딸년이 사람 보는 눈이 꽤나 있구만 그래. 자네! 훌륭하구만. 그 나이에 벌써 사시에 붙다니... 내년 초에 우리 둘째 딸년과 혼례를 하고 우리 집 사람이 되는게 어떤가. 내 잘 키워줌세.”
조 회장은 물려받은 땅으로 부자가 된 인물로 처세에 능하고 교활했다.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다 몇 년 전 본부인과 큰 딸을 쫓아내고 현경과 그 엄마를 정식으로 들였다. 윤락가 마담 출신인 현경의 엄마를 닮아 인물이 좋은 편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현경을 정구가 진심으로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결혼을 그리 쉽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현경이와 아무 사이도 아니구요. 또 제겐 3년이 넘은 여자 친…”
“아 그 아가씨 얘기라면 관두세. 듣자하니 그 아가씨한테도 좋은 기회가 생긴것 같더라구.”
애써 거절의 뜻을 밝히는 정구의 말을 막고 조 회장은 거푸 술잔을 채워 정구에게 권했다.
연수가 ‘국비’ 장학금으로 독일에 갈 기회라고 생각한 그 것은 다름 아닌 조 회장이 마련한 조치였다.
냉정한 이별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붓는 정구의 얼굴을 눈물이 범벅된 채 연수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뺨에 내리는 눈과 눈물이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남자의 옆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정구씨.
나도 마음 편하게 독일로 떠날 수 있겠다...
밥 잘 챙겨먹구, 술은 조금만 마시구... 우리 정구씨 멋지게 정장 차려 입고 첫 출근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행복해야해...
그리고 꼭...
우리 ...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언젠가는 해야 할 연수와의 이별이었다. 정구와의 결혼을 꿈꾸는 연수는 점점 정구에게 부담이었다. 자칫 발목을 잡히게 될까 전전긍긍하던 이 정구는 의외로 쉽게 찾아 온 이별에 잠시 당황했다. 그는 연수의 얼굴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 애꿎은 눈을 발 끝으로 차며 시선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정구는 사실 연수가 사라진 그 다음 날 부터 그녀를 찾아 헤맸다. 피아노과를 찾아가자 그녀는 이미 휴학계를 내고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조교가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 정구도 어리석은 인간중 하나였다. 소중한 것은 놓친 후에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이상하게 그 누구도 연수의 소식을 아는 이는 없었다. 연수가 사라진 후 정구는 오히려 선도 보지 않았고 따로 만나던 여자들에게도 연락을 끊었다. 학교 앞 주점에선 연일 술이 떡이 된 채 비틀거리며 자취집으로 향하는 정구가 발견되었다.
어느 날 부터 만취해 주점을 나서는 정구의 옆에는 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수가 유학을 떠나고 정구가 현경과 사귀는 것은 정해진 행로였다고 참새들은 떠들었지만 정구는 여전히 현경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경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정구네와 현경의 가족이 상견례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정구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차가워진 표정으로 서슬을 세우고 다녔다.
현경이 임신한 지 3개월째에 그들은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이정구는 법복을 입는 대신 조 회장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S상사 무역부에 대리로 입사를 했다.
임신 5개월째가 되자 조 현경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아버지 소유의 대천 별장으로 내려가 출산을 하고서야 돌아왔다.
이 정구는 처음부터 한주를 그다지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아이를 볼때마다 사랑해도 버려야 했던 연수가 떠올라 항상 우울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도 연수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이 때문에 현경과 결혼한 것은 맞기 때문에 죄도 없는 아이에게 원망과 회한이 들었었다.
“제기랄...
왜 못 벗어나는거지…”
혼자 거푸 술잔을 비우던 이 정구가 혼잣말을 했다. 한주가 죽었을 때 물론 애비로써 그는 슬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약해빠져 스스로 생을 놓아 버린 어린 아들에 대한 연민은 없었다. 아들을 그리 내몰았다고 반성하지도 않았다.
‘약해빠진 놈. 난 그보다 더한 환경에서도 잘 버텼고 살아남았고 성공했어. 그런 놈은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나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속마음은 그랬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자식이란 핑계로 미뤄왔던 이혼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그가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다 장인 덕이었고 교활한 장인이 회사 회계에 손을 댄 것에 그도 은밀히 연루되어 있었기에 등을 돌렸다간 혼자 다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공하고 싶었고 그렇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꼭두각시역을 도맡아 하고 있는 처지를 깨닫자 절망스러워졌다.
“아우, 이 아저씨가 정말... 여기서 자빠져 자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서 집에 가슈!”
맥없이 머리를 테이블에 꽂고 엎드린 이 정구의 발치를 거칠게 비질하던 포장마차 주인이 퉁명스럽게 타박을 하기 시작하자 그제사 이 정구는 겨우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